[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03)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03)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2.13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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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살모사처럼 모삽고 모진 넘들! 인간의 탈을 쓰고는, 천벌을 못 피하리!”
네거리에 삐죽이 선 장승을 본 듯 넙죽넙죽 절을 했단 말이요!
호랑이몰이에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슴 모양 파리한 모습으로 바들바들 떤다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이는 일 바구미인 아버지와 뒤늦게 합세한 어머니가 주야로 노력한 결과였다. 그간 등골이 휘고 뼈 빠지게 지은 농사에서 소작료로 제 살 베듯 절반 정도를 잘라주고 나면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한데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고 내 땅이란 전답 문서를 손에 쥐고 보니 오롯이 내가 먹을 양식이 내 논밭에서 자란다는 생각에 절로 배가 부르다. 고되고 힘든 농사일임에도 불끈불끈 힘이 들어간다. 이대로 몇 년만 더 허리띠를 졸라 고생을 한다면 고모의 진료비와 약값 등으로 인해 팔아버린 옛집도 되찾을 수 있으라 여겼다.

그간 할머니는 신혼의 단꿈에 젖고 할아버지와 더불어 나란히 손때가 묻어나는 옛집이 생각날 때면 빈 입만 다시며 하늘을 쳐다보는 것으로 지난날의 향수를 달랬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생각나는 만큼 높다란 누마루가 있고 커다란 가마솥이 걸린 아궁이가 있는 옛집이 문득문득 그리웠다. 살아생전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어렵더라도 차후에는 아버지가 찾아줄 것만 같아 농사일에 날로 재미가 붙었다. 할머니의 마을을 알 길 없는 어머니가 몸을 생각해서라도 쉬기를 권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몸 편하게 앉았으면 잡생각만 일어 머릿속만 복잡하다며 기어이 호미를 들고는

“야~가! 저승길이 낼 모래라고 이 시어미를 아예 송장 취급해라!”하고 노여움을 나타내는 통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할머니가 호미를 땅속 깊숙이 박아서는 뿌리까지 파는 극성에 오뚝이처럼 달랑달랑 고개를 쳐들던 지심도 어느 한순간 지쳤나 보다. 지심의 극성이 슬며시 꼬리를 내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계절은 입추란 절기를 넘어서 처서가 눈앞이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눈앞으로 가을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든다. 새벽 나절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 들로 나갈 때는 이슬받이로 바짓가랑이에 걸쳐 발목이 축축해져 온다. 논둑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나락 이삭이 가을 쏘나타를 합창하는 듯 바람결에 휩쓸려 서걱거린다. 듣는 소리만으로도 절로 삶을 살찌게 하는 계절이다. 그즈음 할머니는 논밭으로 나가는 대신 새참용으로 안반이 비좁도록 홍두깨로 국수를 밀고, 감자나 고구마 등을 삶으며 소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가는 세월만큼이나 할머니도 나이를 먹고 있었다. 세월에 편승하여 늙어가고 있었다. 늙어가는 만큼 앞산을 노려보는 원한 또한 깊어지는 모양인지 때때로

“에~이 살모사처럼 모삽고 모진 넘들! 인간의 탈을 쓰고는, 천벌을 못 피하리!”하는 저주 끝에 양손을 받쳐서 허리를 펴는 모양새가 그랬다. 아직 지팡이를 짚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난 봄날에 비해 허리는 휘고 근력도 예전만 못해 보였다.

그런 와중에 한가위를 십 여일 앞둔 어느 날에 할머니는 봄에 만난 매파를 다시 만나고 있었다. 그날은 시린 에메랄드빛으로 감도는 하늘가득 양떼구름이 하얗게 깔려 있었다.

봄철과는 달리 삽짝을 들어서는 매파 뒤편으로 초로의 남정네가 짐 진 지게를 지고서는 따르고 있었다. 오뉴월 하루 볕이 무섭다고 그간 백구도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익히고 배웠는지 딴에는 제 밥벌이를 한답시고 송곳니를 허옇게 드러내어 ‘컹컹’거려 짖는다. 백구가 으르렁거리든 말든 마당으로 불쑥 들어선 매파는 제집에 든 듯 뒤쪽 남정네를 채근하여 준비해온 초석(‘돗자리’의 방언)자리를 마당 한가운데에 길게 깔고는 할머니를 향해 개다리소반이든 호족반이든 하여튼 상을 내오란다. 매파의 청에 따라 상이 등장하자 지게에서 붉은 보자기로 곱게 싼 함을 조심스럽게 내려서는 상위에 얹더니

“끝순인가 뭔가 하는 딸내미는 지금 집에 없지요?”하고는 대답도 들을 필요 없다는 듯

“그럼 할 수 없지요!”하더니 할머니께 절을 하란다. 웬만하면 할머니도 한 번 정도는 물어볼 만도 한데 지난 봄날에도 그랬듯이 그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여 양손을 가지런하게 모아 이마까지 올려서는 나부죽이 큰절이다. 할머니도 그 함이 이미 무엇이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지레짐작으로 대충 알고 있는 듯했다. 매파가 요구하는 일정의 요식행위가 끝나자

“인자는 나도 모르겠네! 아니 그 떵떵거리는 집안서 무슨 영화를 보자고 어째 이리 서두르는지 모르겠네! 뭐가 아쉽다고 굴러든 복은 죄다 일 없다 물리고 삼일 피죽도 못 먹을, 어디서 빌어먹을 개뼈다귀 같은 집구석에 동냥 그릇을 내밀어 구걸하듯 구걸을 하는지!”하는데 할머니는 속으로 은근한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눌러 참으며

“이거는 다 뭡니까? 도대체 내력이나 알고 받읍시다”하며 매파를 건너다보는데

“아니 그러면 이것이 뭔지도 모르고 낯선 동네서 서낭당을 만난 듯, 흙으로 진토가 된 먼 조상의 산소를 본 듯, 네거리에 삐죽이 선 장승을 본 듯 넙죽넙죽 절을 했단 말이요!”하고는 답답하다는 듯

“아~ 글씨 지난봄 내가 귀신이나 살법한, 다 허물어져 가는 이놈의 집구석을 본 그대로 마님께 전해드릴 때만 해도 없는 일로 여기더니 느닷없이 나를 불러서는 갔다가 오라 성화잖수! 군소리 말고 최대한 하심(下心)으로 몸을 낮추고는 조신(操身)하게 다녀오라고 당부, 당부를 거듭해서 심부름을 시키잖수!”하더니 습관처럼 허리춤을 뒤적거려 예의 손수건을 찾아서는 개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훔친다. 할머니도 그 모습에 빙의라도 된 듯 허리춤에서 습관처럼 손수건을 꺼내 어루만지며

“글쎄 각설하고 이것이 다 뭐요?”하고 되묻자

“보고도 몰라요! 사주단자에 이바지 음식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만반진수에 진수성찬, 음식이잖수! 곱다시 절을 하기에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하며 퉁명스럽게 내뱉는데

“음식은 그렇다 치고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 사주단자인가요? 우리는 시방 듣고 보는 게 첨이라 도대체가 믿기지 않아서요! 혼담을 넣은 적도 또 청혼을 넣은 적도...!, 그리고 우리 딸애가 그라는데 단지 얼굴만 넌지시 두 번에 걸쳐 스쳐서 본 것이 전부라 해서! 아무래도 뭔가 잘못 알고 찾아온 것은 아닐런지요?”

“나도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악담 같지만 이를 어쩌나 틀림이 없습니다. 사주단자는 그 댁 도련님이고 받는 사람은 끝순이라고 바로 이 집 따님이지요! 아무리 엄벙덤벙한 매파라도 그만한 것도 모르고 올까 봐요! 하여간 나는 똑바로 전해 드렸으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하소! 아~ 그간 섭섭한 감정이 있었다면 부디 마음에 담아 두지랑 마소! 특히 따님께는 절대 비밀로 부탁드립니다”하고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며 초로의 사내에게 눈짓하여 썰물 빠져나가듯 삽짝을 나선다.

매파와 초로의 남정네가 마당을 나가자 붉은 꽃과 진분홍색 꽃이 아래위로 화들짝 핀 손수건을 오른손에 바짝 거머쥔 할머니가 앞산에다 시선을 고정으로 섰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는 듯 멍하니 섰다. 귀신에 홀린 듯 망부석처럼 섰다. 호랑이몰이에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슴 모양 파리한 모습으로 바들바들 떤다. 얼마 동안이나 혼이 나간 듯 그렇게 서 있었을까? 문득 정적을 깨듯 소슬바람이 아스라이 분다. 그제야 토막잠에서 깬 듯 할머니는 듯 주위를 휘둘러 사성이 들었다는 함을 안방 시렁 위에 보자기를 덮어서 고이 간직하고는 나머지 상자를 열어서 살피는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식들이 상자 속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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