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00)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00)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1.21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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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만한 처녀를 속되게 발가벗겨서 벌이라 문밖에다 세울 수도 없다
한 송이는 빨갛고, 한 송이는 진분홍색으로 화들짝 피었다
굶주림을 못 참아 하던 어미는 온다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야반도주로 집을 나가버렸다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다음날부터 할머니의 감시 감독 아래 고모는 지독한 신부수업에 들어야 했다. 농투성이의 아낙으로 일에 파묻혀 고단한 삶을 살든, 부잣집 마나님으로 몸종을 거느려 기세등등하게 살든! 하여간 어디로 가든 시집은 가야만 한다며 할머니는 바느질을 시작으로 음식 장만 등을 손수 가르쳤다. 고모도 처음에는 할머니의 시퍼런 서슬에 기가 죽어 고분고분했다. 하지만 고모는 원래부터 자유분방한 성격에다 만만찮은 역마살을 품고 있었다. 잠시만 앉았어도 절로 사지가 틀어지는지 이 핑계 저 핑계를 들어 수시로 자리를 비웠다. 병석을 털고 난 지금껏 천둥벌거숭이 모양 어디 한군데를 들어서 지근덕하게 눌어붙어 앉은 꼴이 없다 보니 당연했다.

“이 지지리도 못난 이것아! 다 늙은 어미 속 그만 태우고 어째 좀 배우는 시늉이라도 좀 해봐라!”하고 할머니가 반은 협박, 반은 애원 조로 다그쳐도 소용이 없었다. 똑바로 앉았던 자세는 일다경도 못가 장마철 개울가를 들어 개구쟁이들이 모래로 지은 두꺼비집 모양 허물어진다. 이어서 재생되는 레퍼토리는 천편일률이다. 머리가 아프다. 배가 아프다. 다리에 쥐가 나서 저리다. 소피가 급하다고 노래를 부르는 데는 방법이 없었다. 며칠을 못가 할머니는 두 손 두 발을 들고는 항복이다. 다 큰 딸내미를 들어 회초리를 들 수도, 약해 빠진 고모를 두고 밥을 굶길 수도, 말 만한 처녀를 속되게 발가벗겨서 벌이라 문밖에다 세울 수도 또 거리로 내좇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될 대로 되라는 식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마저 시집을 가면 으레 다 합니다. 하고 말리는 데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무당의 예언이 참이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렇다고 영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부수업이 막을 내리는 날 동무라 찾아온 옥자와 한참 동안 눈을 맞추던 고모가 기어이

“엄마 나 옥자랑 잠깐만!”하더니 승낙 여부는 관심 없다는 듯 훌쩍 자리를 뜬다. 기가 차서 고모의 빈자리를 둘러보는 할머니 눈에 네모난 하얀 천 위아래로 모란인지 능소화인지 모를 꽃 두 송이가 앙증맞게 수놓아져 있다. 한 송이는 빨갛고, 한 송이는 진분홍색으로 화들짝 피었다. 남색 줄기를 따라 새파란 잎사귀도 두서너 잎 짝을 지었다. 처음 해보는 솜씨치고는 제법 세련미가 흐른다. 일류라고 하기에는 조잡스러워 보여도 그럭저럭 남들 눈에 흉을 잡힐 정도는 아니다. 무어에 그리 급했는지 마름질이 채 끝나지 않은 미완으로 주인의 손길을 벗어나 방바닥에 떨어져 있다. 하지만 진흙 속에서 보물을 찾은 듯 양손으로 펼쳐보는 할머니는

“어디서 본 눈썰민가? 마음만 내키면 이리 괜찮은데! 저리도 천방지축이니 원!”하다가 다시 내려다보며

“후일 어느 집 마님이 저것의 시어머니가 될지 모르겠거니와 불식간 노여움을 사서 소박을 맞아 쫓겨 온다고 해도 원망은 못 하리!”하고 중얼거리는 할머니는 고모의 손끝은 그런대로 맵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바느질의 경우 간격도 촘촘하니 깨나 솜씨가 있어 보였다. 나아가 나물무침도 그럭저럭 감칠맛이 돌아 먹을 만했고, 지짐이도 얄팍하게 늘여서 골고루 잘 익혔다. 이를 계기로 할머니는 신부수업이란 단어를 감추고는 기회다 싶으면 슬쩍슬쩍 일거리를 만들어서는 놀이 삼아 시켰다. 그때마다 고모는

“엄마는 또 그런다. 이것도 계획적으로 신부수업 이제?”하고는 영악스러운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다간 입을 뾰로통하게 내미는 것과는 딴판으로 순순히 따랐다.

할머니의 그해 여름은 더없이 바빴다. 논밭 일로 정신없는 아들 내외 대신 아직은 철부지라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나부대는 손자(나)를 돌볼 라네!, 고모를 다독거려 심부름처럼 신부수업을 시킬 라네, 그 외에도 집 안팎을 휘둘러 텃밭을 일구고 남새밭을 다독거려 각종 채소 농사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할머니는 감골댁을 비롯하여 동네 아낙네들을 만날 때면 내 남을 안 가려서 고모의 신랑감을 구해 보라며 은근히 압력을 가해서 채근이다. 그때마다 넙죽넙죽 말은 좋아

“아~ 예~ 예! 어느 분의 분부 시온데 받들어 모셔야지요! 사방팔방으로 두루두루 알아보고 있읍죠! 암요! 어련히 알아서 마땅한 자리의 혼처가 나서면 당연히 말씀드려얍죠! 그라믄 입소!”하고 큰소리만 땅땅 치고는 돌아서면 죄다 꿀 먹은 벙어리다. 할머니가 그때 그 일은 이미 끝장을 보았고 고모랑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누누이 해명을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이는 그 댁 마님이 한 성깔이 있고 뒤 끝이 대단하다는 데 있었다.

가진 재산으로 말하자면 재 너머에 사는 사람이건 뜨내기로 동네에 드나드는 사람이건 간에 그 집안의 땅을 밟지 않고는 그 어디에도 갈 수 없을 만큼 이 동네 저 동네를 들어 전답이 흩어져 있었다. 그런 까닭에 누구든 밉보이거나 마님의 눈 밖에 났다 하면 한마디로 동네를 들어서 살기가 어렵다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있었다. 토박이든, 드난살이든, 뜨내기든 여차하며 동네에서 쫓겨나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집안에서 눈독을 들인 혼사라 성사가 되든 못 되든, 못 먹는 감 찔러보듯 했다손 치더라도 도련님의 혼사가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는 눈치 없이 나설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과거 어느 때 영감이 동네 처녀랑 눈이 맞은 적이 있었다. 둘은 은밀하고도 비밀스럽게 만났다. 하지만 마님의 예리한 눈초리는 피해갈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그 처녀의 집은 마님의 불호령 아래 동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서 수년이 지난 뒷날이었다. 영감은 타고난 바람기를 못 참아 한미한 소작인의 딸을 마음에 품었지만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나마 나은 점이라면 첫 번째로 쫓겨 간 집안이 겹겹이 불행을 맞았다는 소식에 퇴직금처럼 얼마간의 재물을 더 챙겨서 받아갔다는 것이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동네를 떠난 처녀의 식구들은 호구지책으로 살길이 막막해지자 아비어미는 궁리 끝에 인륜을 저버리고 처녀를 다독여 얼마간의 금액으로 흥정, 홍등가에 팔아 버렸다. 그 돈으로 당분간은 그럭저럭 버티어 살았지만, 수입은 없고 곶감 꽂이(‘꼬챙이’의 비표준어)서 곶감 빼먹듯 하다 보니 얼마 안 가서 바닥을 보였다. 돈이 떨어지자 쌀이 떨어지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굶주림을 못 참아 하던 어미는 온다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야반도주로 집을 나가버렸다. 살아있는 입에 거미줄 칠 일은 없다지만 아비는 농군으로 있을 때와는 달리 무능 그 자체였다. 엄동설한 맞아 짚단 등으로 한 번 더 겨우살이 준비했으면 되었을 것을, 그날 이후 세상을 포기한 듯, 게으름뱅이처럼 술과 잠으로 일관하다가는 자식새끼들과 함께 동지섣달의 강추위 아래 이태 만에 얼어 죽어버렸다.

졸지에 주인을 잃은 집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필요치가 않았다. 시린 하늘 아래 거적때기로 누덕누덕 덮은 지붕 위로 머리를 푼 흰 연기가 아련하게 피어올랐다. 그도 잠시 잠깐, 연기가 끊긴 아래로 한때나마 단란했던 보금자리는 한 줌의 재로 스러졌다. 그리고는 곧장 한 많은 삶의 터전은 멀지 않은 곳, 양지바른 산 밑으로 옮겨 봉분 두 개로 나란히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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