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99)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99)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1.16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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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 8월 한가위를 맞아 블루문의 보름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10일, 8월 한가위를 맞아 블루문의 보름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황진이는 조선 시대 중종 때의 여인이다. 그 어미가 시냇가서 빨래하는데 지나가던 황진사가 보고는 첫눈에 반해 품었었더니 ‘황진’을 낳았다고 전한다. 남녀의 운우지정만 없었을 뿐 고모가 하는 이야기가 은연중 그 꼴만 같다. 돌아서 앉든 마주하여 앉든 초면의 여자가 빨래하는 모습이 뭣에 그리 어여쁘고 요염해 보였을까? 엉덩이가 덜렁거리는 모양새가 물레방아 간의 떡방아를 연상케 해서 한량노름의 도련님 음심이 동했나? 평소 감쳐진 흰 살결이 소매 끝동을 몇 겹 접고 치맛자락을 걷어서 조금 들려낸 것이 무어에 그렇게 문제가 되었단 말인가? 게다가 황진이(본래 이름은 ‘황진’으로 후일 접미사 ‘이’가 자연스레 붙은 이름)의 어미 진현금은 앞 못 보는 봉사(‘시각 장애인’을 얕잡아 이르는 말)라고 하질 않은가? 따지고 보면 미색의 여부를 떠나 황진사의 괜한 음심이 동해 목적 없이 품은 데서 빗어낸 일이기도 하다.

고모가 미색이 빼어나긴 하지만 건너편 방천이라면 한참이나 떨어진 거리다. 제아무리 시력이 뛰어나고, 남다른 심미안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만한 거리를 두고 예쁘고 못난이를 어떻게 판단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목구비가 반듯하다고 단정하여 판단할 수가 있단 말인가? 넙데데해서 얼굴이 크다면 또 모르겠거니와 손바닥으로 능히 가릴 수 있는 조막만 한 고모의 얼굴을 두고 어떻게 자세하게 볼 수가 있었단 말인가? 치마만 둘렀다 하면 침을 흘리는 색마가 아니 다음에야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색마’란 단어에 할머니는 오던 잠이 싹 달아나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까닭 없이 빼어난 인물 때문에 고모가 횡액을 당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자 할머니는 송장이 일어나듯 벌떡 일어나 앉는다. 어둠 속에서 이불을 젖혀 오도카니 앉아 생각에 잠겨볼 때 또 색마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나이가 들고나서부터 한량 끼로 수월찮게 홍등가를 드나들었어도 지금껏 추문이나 염문을 뿌렸다는 소문은 일찍이 없었다. 그런 한편으로 할머니는 파락호(破落戶)만 아니라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술과 여자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좋은 경험이라 생각되었다. 그런 가운데 내 노라! 하는 양반가의 가정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나름대로 주도가 서릿발 같고 심지가 깊다는 소문이 은근하게 돌고 있었다. 게다가 정말 색마라면 고모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녀 감언이설을 늘여 놓아야 함에도 그런 기미가 전혀 없다. 그도 저도 정 안되면 보쌈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런 기미조차 털끝만큼도 없다. 그러한 젊은 날의 객기가 후일 문제가 된다면 부모가 전면에 나서서 재물로 마무리하는 것이 양반가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병구완에 능장코가 빠져 딸자식의 교육은 뒷전으로 키운 탓에 일자무식한 년이 인물만 반반하여 이 남자 저 남자를 두고 구미호처럼 꼬리를 치는 모양새가 사내 여럿 잡을 상이라는 등 적반하장으로 덮어씌우기가 일쑤다. 한데 단지 두 번 본 것으로 매파를 불러 정식 청혼을 넣는 것으로 보아 진정성이 전혀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 이 말도 안 되는 상황극은 당체 무어란 말인가? 혼기를 넘긴 만만찮은 나이에 젊은 청춘의 풋바람도 아니고 우리보고 어떡하란 말인가? 첫닭이 울고도 할머니는 한참이나 잠자리에 누워 전전반측,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도대체가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답답한 마음에 앙가슴만 주먹으로 내려칠 뿐이다. 홀로 몸부림에 허공을 내 졌는 손길이 하얗다 못해 뽀얗게 시려서 서글프다. 오늘처럼 저승길로 먼저 떠나간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운 적이 없다. 있다 해서 뾰족한 수는 없겠지만 찬바람이 훑어가는 옆구리가 허전하여 억장이 무너지는 새벽이다.

할머니의 타는 가슴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모는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져서 꿈길을 달리고 있다. 미인 박복이라 했던가? 언젠가 고모의 인물이 화를 불러오리라 좌불안석으로 불안스러웠는데 곧장 눈앞으로 다가든 느낌이다. 하지만 이야기만 들어서는 손을 쓸래야 손쓸 방도가 없다. 하다못해 손목이라도 잡히든 해야지 딸 가진 어미로서 당당하게 나설 수 있다. 단순히 이름과 사는 곳을 물었다고 해서 딸자식의 장례를 책임지라고 선뜻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편으로는 일등 신랑감의 도련님 사랑이 맹강녀를 본 진시황의 짝사랑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속으로 신라 진평왕 때의 가실과 설씨녀와 같은 그런 사랑이었으면 하고 속으로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그런 사랑이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여겼다. 꺼릴 것이 없는 남녀의 지독한 짝사랑은 화촉 동방을 밝혀 맺어주면 그만이다.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는 생각 등으로 밤을 꼴딱 지새운 할머니는 다음날로 고모와 더불어 빨래를 함께 했다는 동네 처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고모와 말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옥자라는 처녀를 찾아갔을 때도

“그게 그러니까요! 그게요!”하고 고개를 숙인 옥자는

“어머님 그게요! 별말 없었어요! 끝순이 나이랑 이름, 그리고 사는 곳을 묻는데 나이는 알려 줄 수가 없어서 이름과 집만 겨우 알려 주었어요!”하고는 죄인 모양 고개를 떨군다. 옥자도 처음에는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서 따라오는가 싶어서 얼마나 가슴이 설렐는지 몰랐다고 했다. 한데 고작 묻는다는 것이 어리숙하고 맹추 같은 고모를 들먹거리는데 눈앞이 캄캄하더란다. 작은 마님이란 꿈이 일순간 무너지는 느낌에 친구를 떠나 한때는 고모를 시기하고 미워도 했다. 한데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란다는 말이 생각나는 통에 마음을 접었다며

“끝순이랑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하며 무안한 듯 재차 고개를 숙인다. 혼기가 꽉 찬 옥자건만 고모 때문에 그 꿈을 접었다고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에 할머니가

“그래 이것아 그게 어디 인력으로 될 일인가? 끝순이도 마찬가지다. 하늘이 미리 정해놓은 연분이란 아무도 모른단다. 그러니까 너는 너무 서운해하지 말거라! 그깐 이름과 사는 곳쯤이야! 들어보니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네! 그래도 너는 지각이 있어 나이만큼은 숨겼잖니! 고맙다”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옥자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가 축대에 엉덩이를 걸쳐 가만히 생각에 잠겨보자니 아까웠다. 잡았다가 놓친 고기만큼 머릿속에서 쉬 떠나질 않는다. 늘 생각하기를 저 덜떨어진 고모는 부잣집으로 시집을 보내는 것이 최 상책이라고 여겨왔던 할머니였다. 그 기회가 뜬구름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느낌이다. 할머니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 애달았다. 밥풀때기의 미끼를 보고 대물 잉어가 입질로 붙어 초릿대가 휘청거렸건만 낚아채지 못한 자신이 한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어쩔 것인가? 아무리 궁리에 연구를 거듭해도 방법이 떠오를질 않는다. 손목이라도 잡히고 입술이라도 못 이기는 척 내주었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아쉬움을 나타내는 할머니는 언감생심, 속에든 마음 같아서는 이참에 임신이라도 했으면 싶었다. 다음은 전적으로 어미인 죄로 할머니의 일이고, 책임이고, 몫이라 대문간에 자리를 깔고는 석고대죄를 하듯 머리를 풀어헤쳐서는 죽어가는 여식을 살려달라고 애원에 하소연은 당연지사라 여겼다.

한데 손에 움켜쥘 썩은 동아줄 한 오라기 없다. 어디다 비비고 싶어도 비빌 언덕이 없다. 마음속에서 선과 악이 진흙탕 싸움이다. 어미란 인간이 지금껏 입이 닳도록, 귀에 따다구(‘귀지’의 속된 말)가 않도록 거듭한 딸자식 교육을 여반장으로 뒤집는 꼴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 음모를 꾸미는 모양새다. 행복을 구실로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모양새다. 혼기 찬 처녀가 함부로 몸을 굴려서는 안 되겠지만 이런 경우라면 못 이기는 척, 슬그머니 치맛말기를 풀어도 무방하다 여겼다. 장차 몸이 영화로운 데는 눈 한번 질끈 감아 넘어가거라 생각한 할머니는 이미 쏟아진 물이라 여겨 모두 잊기로 했다. 그렇다고 세인들의 구설에 휘말린 고모를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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