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98)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98)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1.09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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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이무기처럼 이리저리 물을 튀기며 나 홀로 장난질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냥 한 대 콱 쥐어박아 패주고 싶어
다음날로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벌컥 화를 내잖아!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쫓기듯 사내 둘이 물러간 이십 여일 지난 어느 날 문제의 희멀건 사내 혼자 빨래터를 기웃거리더란다. 이런 경우에 보통은 이웃 동네 처녀들을 괜한 마음에 집적거려 보자는 건달 정도로 여겨 돌팔매질로 쫓아 보내는 것이 상례다. 하다못해 불한당이라고 고함을 치던지, 동네 어른들을 부른다며 으름장을 놓아 저리로 꺼지라는 것이 일반상식이다. 한데 무슨 이유에선지 다들 입을 다물고는 얌전을 빼더란다. 못 본 척 고개를 숙여서는 요조숙녀처럼 조물조물 빨래에만 열중이다. 아마도 순진을 빙자해 사내의 눈길을 한 번이라도 더 받아보려 안간힘을 기울이는 모양새만 같다. 분위기 파악이 안 된 듯 고모만 못된 이무기처럼 이리저리 물을 튀기며 나 홀로 장난질이다. 다들 현모양처라도 된 듯 입은 닫고 몸을 사리는 모양새가 이해 안 되는 고모만 기세등등하여 선 머스마처럼 나댄 꼴이다. 결국에 그날은 분위가 이상야릇하여 일찌감치 빨래터를 작파하는 것으로 집으로 향했단다.

방망이질 두어 번에 헹굼도 덜 끝났음에도 주섬주섬 빨래 바구니를 챙긴다. 속옷에 끼워서 무릎까지 걷었던 치맛자락을 급하게 내리더니 발등까지 한껏 잡아당겨서는 수줍게 일어서더란다. 고모도 어쩔 수 없이 입이 한발이나 나와 덩달아 일어났다. 그런데 그 사내가 홀로 가는 옥자의 뒤를 보란 듯 따라가더란다. 멀어져가는 두 남녀의 다정한 뒷모습에 고모를 뺀 나머지 동네 처녀들은 죄다 종종걸음을 멈추고는

“저기 저~봐! 옥자랑 사이가 좋은가 봐! 옥자를 보려고 왔나 봐! 옥자는 부잣집 작은 마님으로 광땡을 잡은 모양이네! 모르긴 몰라도 옥자 저년은 전생에 나라를 몇 개나 구했나 봐! 안 그러면 저런 복을 어떻게 지니고 태어났을까나? 내가 어디가 옥자만 못할까? 여자 보는 눈하고는 멍청한 것!”하고 처음에는 부러워하는가 싶더니 나중에 이리저리 끌어다 붙여서는 비교를 하더니 바보 멍청이라고 죄다 흉보기에 여념이 없다. 고모는 도대체 왜들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더란다. 둘도 없이 다정하게 지내던 관계가 갑자기 사이가 벌어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부러워하다가 욕을 하는데 그저 당황스럽기만 하다. 어쩔 수 없이 마음에도 찝찝한 빨래를 들고는 오던 길을 되돌아 재차 시냇가를 다녀온 것이 전부라며 이야기를 끝낸다. 할머니가 듣기에 황당하기 그지없다. 고모의 말만 들어서는 그야말로 맹탕이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손목 한번 잡히지 않은 관계에서 덜컥 중매쟁이가 들이닥쳤다. 이걸 어떻게 말로 설명을 해야만 하나? 할머니가 혼자 생각에 잠겨갈 때

“근데 엄마는 오늘따라 별스럽게 왜 그래? 뭘 잘 못 먹었어! 생으로 딸내미를 쥐잡듯 이 잡듯 달달 볶아서 잡고선!”

“내가 언제 그랬나! 그러게 지지바란 것이 밖에서 행동거지를 똑바로 잘하지 그랬나! 말 만한 가시나를 밖으로 내돌려 오냐 오냐 키워났더니 겪다 겪다 별일을 다 겪어요!”

“뭔 별일을 다 겪어? 나도 좀 알기나 하고 꾸지람을 듣든 당해야 억울하지나 않지!”하는데 할머니도 수긍한다는 듯 낮 동안 중매쟁이가 들이닥친 일에 대해 조목조목 이야기를 하자
“그 집에서는 왜 그런다니? 우리 집을 한껏 깔보고는 그러는 겠지! 가진 것들이 더하다더니 나쁘다 정말! 근데 엄마 난 말이지 동네 머스마들 조차 멀리하는 지지리 못난 가스나야! 내가 너무 철이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나이도 몇 살 안 처먹은 가시나가 되바라졌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건지! 그도 아니면 그들 머스마들 눈에 내 몸뚱이를 두고 똥이라도 묻어 보이는가? 코로는 시체 썩는 냄새라도 풍기는가? 하여간 나만 보면 비실비실 피하는데 미깔-스러워(‘밉살스럽다’의 방언) 죽겠어! 할 수만 있다면 그냥 한 대 콱 쥐어박아 패주고 싶어! 옥자랑 미숙이랑은 잘들 어울려 하하~호호! 노닥거리다가 나만 나타나면 죄다 피하는 재수 없는 가스난데! 의도적인 따돌림은 아닌 것 같은데 다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하여간 그런 지지바인 나를 두고 왕청스럽게 그렇게 지체 높은 집안에서 어째서 그런다요!”하는데 할머니는 가슴 저 밑으로부터 울컥하는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잘났든 못났든 딸자식이 또래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데 좋아할 어미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그것도 혼기가 차고 넘치는 딸을 두고서, 대충 이유야 짐작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언짢아서 퉁명스럽게

“그~케 말이다. 다들 눈이 삐었지! 이렇게 예쁘고 깜찍한 우리 딸내미를 두고서 굴러드는 복을 발로 차도 유분수지 다들 어째서 그런다나!”

“한데 엄마! 동네 머스마들은 그렇다 치고 그 집이랑 그 중매쟁이 말이야!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는데 아무래도 무슨 오해가 있어도 단단히 있었던 모양이야! 난 정말 그 머스마 그 자슥을 진짜로 몰라! 사는 데가 뭣꼬 얼핏 스쳐지나 얼굴도 기억에 없다고요! 하여튼 나하고 전생에서 무슨 원수라도 졌었는가는 모르지!”하는데 한껏 억울하다는 듯 눈가로 때아니게 별빛이 반짝거린다.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천장을 쳐다보며 몇 번이나 눈을 깜박깜박 은근슬쩍 소매를 쳐드는가 싶더니

“엄마는 왜? 그런 집에 그런 사위를 보고 싶어! 내가 몸이 약해서 더 그래! 하지만 어쩌겠어! 아까워도 어쩌겠어! 이미 버스는 떠났다며! 미친개에게 물렸다. 생각하고 잊어버려! 언감생심 꿈을 꿀 걸 꿔야지!”

“...”

“노상 병치레인 내가 신데렐라도 아니고, 더군다나 나는 마녀도, 화려한 드레스도, 호박 마차에 유리구두도 없는데!하더니 고개를 숙여 애써 참았던 소매로 눈가를 슬쩍 훔친다. 그 모습이 애처롭기도 한 중에 가슴이 바늘에 찔린 듯 뜨끔한 할머니가

“그래 내 말마따나 아깝지만 어쩌겠나? 어미가 뭘 모르고 무닥지 나무란듯해서 미안하구나!”하고는 속으로 이년아 내 딸이지만 그래도 그 몸에 어느 멀쩡한 남정네를 골병 들이려고 시집은 가고 싶은 모양이구나! 하는 말을 억눌러 참으며 마지막 다짐인 듯

“참말 이제? 엄마가 진짜로 믿어도 되지러!”하고 졸린다며 자리에 눕는 고모를 재차 다그쳐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바지랑대 모양 키가 훤칠한 것만 눈대중으로 대충 안다며 종네는 입도 안 아프냐며 원망 아닌 원망이다. 그리고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짜증 난 몸짓으로 머리끝까지 이불을 홀라당 덮어 써버린다. 그래도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말의 의문이 가슴속으로 남았지만 마음졸이며 우련한 바가 아니라 점에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더불어 궁금했던 점이 다소나마 풀어져 안도의 한숨을 짓는데 고단한 봄날에 취해 하품을 늘어지게 하던 고모가 지나가는 말투로

“근데 엄마 참말 이상도 하지! 옥자 그년이 글쎄 다음날로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벌컥 화를 내잖아! 그 병신 같은 사내 자슥이 내 이름과 사는 곳을 물어 갔다며 잡아먹을 듯 얼굴을 붉히잖아! 그때 오늘 같은 날이 올 줄을 미리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여간 옥자 그년은 내가 뭘 잘못했다고 화를 내는지! 이유 없이 내 이름과 사는 곳을 물어간 그 머스마도 이상한 머스마지만 옥자 그년도 성깔이 지랄 같은 년이야! 그날을 들어 불같이 화를 내고는 오늘은 일삼아 불러 저녁을 같이 먹자며 다정하게 굴잖아! 하여간 전에도 그랬지만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가시나야!”하며 벽을 향해 돌아눕는데

“오냐 아무 일 없었으면 그만 됐다. 밤이 많이 늦었다. 고단할 텐데 그만 자거라!”하고 다독거린 할머니가 고모랑 나란히 잠자리에 들었지만 쉬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이조년의 ‘다정도 병 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하는 다정가의 한 소절처럼 봄 꿈으로 헝클어지는 밤이다. 부질없는 별빛이 유난히도 밝게 봉창에 머물렀다 사그라지는 밤이다. 어느결에 고모의 나지막한 코골이가 꿈결처럼 아늑하게 들려온다. 고모가 가늘게 내어놓는 코 고는 소리에 참 요사스런 봄밤이라 여기는 할머니는 어느결에 빨래라는 단어를 들어 평양 기생이었던 황진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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