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97)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97)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1.02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할머니의 이글거리는 눈동자에서 위기감을 감지하고는 지레 겁을 집어먹다
쪼께만 있어봐라 하라고 등 떠밀어도 못된 송아지처럼 뻗대어 그만둘 년이다
새치름하게 토라진 표정의 옥자도, 미숙이도 하나같이 다들 입을 다물더란다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고모의 귀가는 전에 없이 늦어지고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만큼 심장을 달구는 경우도 드물다. 이제나저제나 고모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할머니는 저녁밥도 뜨는 둥 마는 둥 마당 가장자리를 자근자근 밟아서 서성인다. 심히 초조하다는 몸동작이 한눈에도 확연하다. 마당 가장자리에서 한갓지게 바람을 쐬는 모습치고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어머니가

“어머님 누굴 기다리세요! 손님이 오시기로 하셨어요? 저가 대신 있다가 손님이 오면 곧바로 방으로 안내해 드리면 안 될까요?”청을 넣어도

“아니다. 밤공기가 좋아 심심풀이 삼아 바람도 쐴 겸, 겸사겸사 운동 삼아 나와 있다. 에미는 그저 못 본 척 신경 쓰지 말거라! 그러고 보니 에미야 너는 종일토록 농사일로 시달려서 고단할 텐데 그만 들어가 쉬거라!”하고는 밀어낸다. 그러고도 한 식경이나 지난 후에야 고모는 무어에 기분이 좋은지 고무줄을 타고 넘는 듯 깨금발에 폴짝폴짝 뛰면서 돌아왔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어둠이 깔린 삽짝을 들어선다. 싸늘한 밤공기를 알 일 없는 백구는 마냥 반갑다며 앞발을 치켜들어 오두방정이다. 환영 인사에 답장인 듯 당장에 쪼그려 앉아 귀염을 떠는 백구의 머리를 쓰다듬던 고모는 마당 가장자리에 서서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할머니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서 엉겁결에

“엄마 나 저녁 먹었어! 저기 저 옥자네 집에서!”하고는 할머니의 이글거리는 눈동자에서 위기감을 감지하고는 지레 겁을 집어먹어 뒷걸음질에 우물거리는데

“야~ 이년아 저녁이고 뭐고 간에 시방에 나 좀 보자!”하고는 고모의 손목을 잡아챈 할머니는 불문곡직 방으로 이끌었다. 방으로 들기가 무섭게 할머니는

“이년아 지금부터 이 어미가 묻는 말에 거짓부렁 한마디만 보태면 너 죽고 나 죽는다”하고는 눈을 부릅뜬다. 고모는 병석을 털고 일어난 이래 지금껏 할머니의 이처럼 무서운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절로 사지가 떨려

“엄마 무서워~ 뭐~ 뭘~ 말이야!”하고는 화등잔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빤히 쳐다본다. 엄마 표정이 왜 그래? 하는 듯 천진난만하다. 할머니조차 우격다짐으로 다그치기는 했다지만 지레짐작으로 넘겨짚어 애먼 딸내미만 생으로 잡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일의 선후를 따지고 내막을 세세히 캐내어 확인해야 할 것은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할머니다. 고모의 행적을 속속들이 알아야 대책을 세워도 세울 것이라 여겨 단도직입으로

“이년아 너 남자 있지?” 묻자 재차 눈을 동그랗게 뜬 고모가

“남자는 웬 남자? 누가 그래 내가 남자가 있다고! 옥자가 그래? 나는 남자라곤 그림자도 본 적 없는데! 진짜야 엄마!”하고는 하얗게 질려있는 표정으로 보아 전연 거짓말 같지가 않다. 하지만 이쯤에서 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너 남자가 있으면서도 이 어미가 무서워 말을 못 하지! 부끄러워서 이 어미를 속이고 있는 거지! 있으면 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봐라! 어미가 들어보고 어지간하면 용서해 줄 모양이니까 너랑 눈맞은 그 빌어먹을 머스마, 그 자슥이 도대체 어느 집구석 누구야?”하고 구슬리고 다그쳐도 고모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단다. 하지만 할머니도 낮 동안에 겪을 황당한 일을 생각할 때 쉬이 물러설 수가 없었다. 낮도깨비처럼 매파가 들이닥친 일을 생각할 때 고모의 앞날에 대한 중차대한 일이라 미룰 수가 없었다. 이대로 어물쩍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 수차례에 걸쳐 사탕발림에 위협은 가하는 등 닦달을 하자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던 고모가 고개를 갸웃한 끝에

“몰라~ 몰라~ 아~ 그 자슥 때문인가 보네! 허우대가 전봇대처럼 삐쭉하고 얼굴이 지지바(‘계집아이’의 방어인 ‘기지바’의 속된 말)처럼 희멀건 그 자슥, 그놈 때문인가 보내!”하고 피식 웃으며 떨어 놓는 이야기는 할머니가 듣기에도 알맹이가 빠진 듯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봄날에 들어서서 날씨가 따뜻해지자 고모는 동네에서 또래건, 나이가 많든, 어리건 간에 두루뭉술하게 어울려 시냇가로 빨래 가는 날이 많아졌다. 물론 고모의 빨래라는 것은 간단한 옷가지 몇 벌을 함지박에 담아 놀이 삼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처음 얼마간은 빨아 온 빨래를 두불 일로 다시 빨아야 하는 수고 등으로 인해 어머니가 힘들다고 말려도 막무가내로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 고모 역시 여자라 그런지 손이 시린 줄도 모르고 빨래를 놀이로 즐겼다. 장난삼아 시작한 일이지만 그날 수록 고모의 빨래 실력도 일취월장으로 늘어 누구 못지않게 깨끗하게 빨아왔지만 가냘프고 연약한 몸을 들어 어머니가 길을 가로막고 만류해 보았지만 한결같은 고집이다. 그런 고모를 보다 못한 할머니조차도

“에미야 못 본척해라! 저러다 곧장 싫증 낼 거다. 지깐 년이 뭔 빨래라꼬? 몸도 성찬은기 쪼께만 있어봐라 하라고 등 떠밀어도 못된 송아지처럼 뻗대어 그만둘 년이다”하고 못 본 척 내버려 두란다. 하지만 할머니의 고모에 대한 그러한 지레짐작은 빗나가도 한참을 빗나갔다. 벌써 이태를 넘겨서 고모는 빨래 바구니를 들고 시냇가로 향한다. 친구 따라서 똥장군 지고 장에 간다고 빨래보다 친구들이랑 수다를 떨어 노닥거려 노는 것에 더 흥미를 붙인 모양이었다.

그날도 고모가 시냇가에서 빨랫방망이를 ‘탕탕’두드리는 등 또래의 동네 처녀들과 어울려 시내가 떠들썩하게 빨래를 하는데 맞은편 언덕에서 낯선 사내 둘이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란다. 숙맥처럼 전혀 낌새를 체지 못한 고모를 두고 옆에 앉았던 옥자가

“애~ 끝순아 저기, 저기 좀 봐라!”하길래 고모가 얼굴을 들어보니 방천 위로 웬 사내 둘이서 멍청하게 섰더란다. 그중 희멀겋게 큰 키의 사내가 고모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단박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지더란다. 그도 잠시 사내는 차마 못 볼 것을 본 듯, 술에 취한 듯 비칠비칠 자리를 피하더란다. 그 모습이 어찌나 바보스럽고 우스꽝스러운지 다들 배꼽을 잡고는 웃었단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썩하게 웃는데 옥자가

“얘~ 애들아 그만 들 웃어 방금 그 멀대가 누군지나 알고 웃기나 웃어!”하고 핀잔을 주더니

“일등 신붓감도 열이면 열, 백이면 백으로 죄다 헛물을 켜고는 돌아서게 한다는 재 너머 부잣집! 아니지 그 위세 당당한 집안의 도련님이야!”하는데 사위가 쥐 죽은 듯 고요해진다. 당황한 듯 입을 앙다물더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란다. 고모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왜 그래! 다들 왜 그러는데!”하고 물었지만 새치름하게 토라진 표정의 옥자도, 미숙이도 하나같이 다들 입을 다물더란다. 어느 처자를? 우리 중 누가 마음에 들었을까? 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는데 얼굴로는 발그스레하게 홍조를 띠더란다. 하지만 까닭을 알일 없는 고모는 연신 순진한 표정으로

“왜? 왜~”할 수밖에 없었단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그게 다야!”하고 답답하다는 듯 할머니가 다그치자

“엄마는 이바구(‘이야기’의 방언)를 하라면서 왜 중간에서 말을 잘라먹고 그래!”하고는 퉁퉁 부은 얼굴을 하자

“알았다. 이것아 말 안 끊을게 어디 계속해 봐라!”하고 채근을 하는 할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는 고모는

“응 엄마! 그날은 그게 끝이야!”

“그럼 이바구 한 자락 안 나누고 손목 한번 안 잡히고 그게 끝이란 말이야!”하고 할머니가 선수를 치고 나오자

“엄마는 처음 보는 낯선 남자에게 손목은 웬 손목을? 그리고 엄마가 평소 말하길 여자는 목숨을 버릴지언정 지조와 정조 관념이 있어야 한다며 귀에 따다구가 앉도록 그래놓고는, 난 뭐 여자도 아닌감! 나도 여자로서 지조에 자존심은 있다고! 부끄럽고 남세스러운 것도 알고요! 그리고 정조 관념도 그 누구 못지않게 있다고! 차돌처럼은 몰라도 엄마 생각처럼 그렇게 헤프지 않다구요! 아이참 그리고 중간에 말 안 끊어 먹는다면서 왜 그래!”하고 눈을 치켜뜨더니 다음 말을 잇는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