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의 대안은 농업이다.
위험사회의 대안은 농업이다.
  • 황환수 기자
  • 승인 2019.04.04 11: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병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안전교육장이 교육생들로 넘쳐난다. 차들은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며 줄지어 대기하고 공항에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 차례를 위해 대합실이 북적거린다. 그러나 이 이면에는 병원에서 고통받는 이들이 많다는 의미이며 차들은 사고를 예견하지 않는 사람들이 속도감과 편리성에 감염된 사실을 잊고 있다. 하늘의 비행기도 추락이라는 최악의 뉴스가 남들의 불행일 뿐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안전교육장은 위험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전제를 상정하지 않고 안전이라는 단어에만 집착하는 교육생들의 의식에 주목한다. 

현대 기술산업사회가 문명적 원리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고 비자연적인 문명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이 말의 반대 의미는 자연적이고 있는 그대로이며 기술적 작용이 배제된 문명을 지칭한다. 우리는 어느새 자연적이고 과학이 얽히지 않은 삶을 원시적이거나 되돌이킬 수 없는 가난한 사회의 틀을 연상하는 버릇을 은연중 지니게 됐다.

농업을 바탕으로 수만 년 동안 이어졌던 삶의 방식이 산업혁명이란 기술적 개발을 통해 농업의 감성적인 삶은 구시대의 뒤떨어진 생활로 여겼으며 이러한 진보 또는 진화라고 일컫는 반문명적 패턴의 현대는 위험인자도 더불어 급증했다.

현대사회는 위험사회라고 한마디로 정의한 울리히 백의 선언은 그래서 매우 타당한 설정임은 분명하다. 전쟁에 따른 인간의 희생보다 자동차의 전력질주로 목숨을 앗아가거나 불행한 삶을 영위하는 숫자가 월등하다는 사실에서 울리히 백의 진단은 설득력을 갖기에 충분한 교훈이다.

속도감이 없는 농업사회는 감성적인 인간 본연의 특성을 십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안전한 사회망을 획득하고 있으며 생존에 필요한 절대적 요소인 위험인자가 제거된 식량수급에도 최적의 조건들을 갖춘 인류미래의 마지막 사회형태임을 동서의 지식인들이 입을 모아 주창하고 있다. 위험요인이 제거된 안정한 사회는 속도감이 없는 사회의 다른 이름이다.

현대사회는 모든 영역에서 속도전을 경쟁하는 시스템이고 이는 곧 위험인자를 더불어 부풀리게 하고 있다. 속도경쟁은 편리성을 앞세워 정보분야를 비롯해 산업전반에 걸친 돌이킬 수 없는 패러다임으로 세계인들에게 각인되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세계를 한순간에 통합한 정보의 편리성은 위험한 정보를 일순간에 지구전역에 전파하는 위험요인도 함께 껴안고 있는 문제를 낳았다. 자동차의 편의성과 속도감이 인간소외와 함께 희생이라는 위험요소를 안고 있듯이.

자연의 변화를 예지하는 능력을 갖춘 이들을 고대로부터 점술가나 예언자로 떠받든 역사는 어느 종족에게나 존재했다. 현대에서도 이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사전예상을 위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며 관찰하곤 한다. 그러나 이 자연적 변화에 대한 인간의 관찰이나 예상은 위험인자를 제거하는데 한계점을 노출하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각변화를 예상하지 못하고 고층건물이 들어선 곳은 엘리베이터나 고층의 전망이라는 즐거움은 안겨주지만 지진이나 화재발생의 경우 치명적인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안정된 삶의 태도는 고급정보나 빠른 정보, 또는 속도감 있는 스피드에서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위험사회로 향하는 진행 과정을 멈추기 위해 우리는 과속의 정지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다급한 사회학자들의 경종이 한결같다. 이를 위해 자연적인 농업에 바탕을 둔 감성적이고 느린 행보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새삼스레 시대의 철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