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베르나르 베르베르 '심판'
[장서 산책] 베르나르 베르베르 '심판'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2.12.2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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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생을 돌아보고 다음 생을 결정짓는 아주 특별한 심판이 시작된다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희곡 작품인 '심판'은 폐암 수술 중 사망한 판사 아나톨 피숑이 천국에 도착해 천상 법정에서 다음 생의 여정을 심판받는 내용으로, '제1막 천국 도착, 제2막 지난 생의 대차 대조표, 제3막 다음 생을 위한 준비'로 구성되어 있다. 

재판장인 가브리엘, 아나톨의 수호천사이자 변호인인 카롤린, 그리고 구형을 맡은 검사 베르트랑이 아나톨의 지나온 생을 조목조목 평가해 환생 여부를 결정한다. '심판'은 주로 이 네 인물의 대화로 구성된 작품으로, 등장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촌철살인의 대화와 유머는 전생과 환생 이야기라는 베르베르의 되풀이되는 주제에 대한 우려를 씻어 주면서 참신하고 유쾌한 대화를 선사한다.

베르베르가 독자에게 선사하는 웃음은 폭소보다는 실소에 가깝다. 전형적인 언어유희와 허허실실한 농담에도 능하지만 그의 장기는 역시 타자적 시선을 통한 특유의 비틀기다. 죽어서도 손에 끼었던 반지에 집착하고, 상속세 때문에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아나톨의 모습은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판'의 재미는 전형성에서 벗어난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역할 설정에도 있다. 피고인 아나톨이 죽기 전 가졌던 직업은 판사였다. 전생에 부부였던 카롤린과 베르트랑은 이혼의 앙금 탓인지 천상에서도 서로를 원망하면서 역할이 뒤바뀐 듯한 장면을 연출한다.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재판장 가브리엘이다. 영혼의 환생 여부를 판단하고 지상의 태아와 짝짓는 중대한 임무를 맡은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전문가답지 않은 허술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마음 약한 이웃집 사람 같은 그녀는 아나톨의 요구에 끌려다니며 쉽게 판결을 내리지 못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역할(재판장)을 아나톨에게 맡기고 환생의 삶을 택한다.

'심판'은 프랑스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건드린다. 아나톨의 폐암 수술을 담당하던 남자 외과의사가 주 35시간 근무가 끝났다는 이유로 수술을 멈추고 병원을 떠남으로써 만성적인 의료계 인력 부족 문제를 지적한다. 천상 법정에서는 변호인과 재판장이 아나톨의 사망 관련 사건 번호를 서로 다르게 알고 있도록 하여 공공 기관의 무능력을 드러낸다. 아나톨이 생전에 내린 판결에서는 법조계의 부패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교육개혁, 결혼제도의 모순과 부조리를 위트있게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의 대다수 작품이 그렇듯 핵심 주제는 여전히 운명과 자유 의지의 문제다. 피고인 아나톨 피숑이 심판 과정에서 스스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이 둘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오랜 고민과 성찰을 드러낸다.

지상과는 다른 가치 체계와 도덕 규범이 작동하는 천상 법정의 떠들썩한 '심판'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주호민 작가의 '신과 함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상에서의 삶을 판단하기 위해 지옥 시왕(十王)의 재판을 받는 '신과 함께'에 비하면 '심판'의 재판 절차는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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