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92)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92)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11.28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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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와 기대감으로 빈 역사(驛舍)를 휘둘러 바장거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만 정도는 알 거네! 나라고 어찌 그만한 자존심조차 없겠나
고래 힘줄보다 질기다는 것이 목숨줄이 아니겠나!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그~기 뭐가 어떻다고! 나라도 사내새끼로 태어났으면 그랬겠구먼! 머스마(‘사내아이’의 방언)새끼로 태어나 그만한 성깔머리 정도는 있어야 밥을 빌어먹든 말든 하지! 처자식 입에 따슨 밥 넣어주지! 근데 그 중요한 때 누구는 어딜 갔다 왔는고? 만사를 제쳐놓고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만한 원망은 안 들어도 될 텐데! 하는 행실머리가 욕을 들어먹어도 싸구먼!”하는데 할머니는 오늘따라 나누는 대화가 알맹이가 있는 듯, 또 없는 듯도 하여 잡다한 사설이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가 늘어날수록 의문스럽기만 하다. 깊어가는 어둠을 뚫고서 야학에서 돌아올 딸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절절한 애심(愛心)이 깃들어 보인다. 행여 식을까 싶어서 아랫목 이불속으로 앙군 밥공기 같은 따뜻함이 묻어난다. 집을 나가 기약 없는 서방님을 오늘내일하고 기다리는 아낙의 한이 서린 애달픈 심정도 설핏 깃들어 보인다. 문설주에 기대서서 어둠에 묻혀가는 고샅에 두고 눈을 떼지 못하는 의려지망으로 간절해 보인다. 온다고 철석같이 한 날짜를 넘겨서도 돌아오지 않은 며느리를 일구월심으로 기다리는 시어머니의 가슴 시린 이야기도 은은하게 풍기 난다. 아린 앙가슴을 양손으로 감싼 초로의 외로움과 고독으로 지친 어깨너머로 은근하게 묻어나는 쓸쓸함이 보인다. 초조와 기대감으로 빈 역사(驛舍)를 휘둘러 바장거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무슨 말을 말을 하고자 하는 걸까? 무엇을 부탁하고자 이리도 서론이 길까? 팽이 돌리듯 머리를 굴려봐도 도대체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 청솔댁을 넌지시 건너다보는데 한참 동안 허공을 올려다보던 청솔댁이 어렵게 결심을 굳힌 듯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더니

“이보게 동~상! 그건 그렇고 자네 수양딸로 하나 삼을 생각이 없는가? 우리 며느리를!”하는데 할머니는 깜짝 놀랐다. 사전의 의논 여부를 떠나 며느리를 두고 수양딸이란 명목 아래 할머니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지금껏 연막을 펼쳤다고 생각하니 기가 찼다. 별똥별이니 잔치니 하며 나누어왔던 지난 이야기가 꿈결만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동네 아낙들이 내남없이 기피 하여 꺼리는 영천댁은 철이 없기는 없었다. 아직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고모조차 영천댁을 두고 철철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잊을 만하면 할머니께 고자질로

“엄~마! 엄마 오늘도 글쎄, 그 아주머니가 오줄이 없기는 없는 모양이야! 생각이고 자시고도 없이 데고말고 주낏나봐! 글쎄 무슨 말을 어떻게 내질렀는지 동네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어!”할 정도였으니 듣는 동네 사람들이야 오죽이나 황당하고 난감했으랴! 그렇다고 멀쩡한 며느리를 팔고 사는 물건도 아니고 덜컹 수양딸로 내놓다니! 할머니는 어이없다 여겨 멀뚱멀뚱 청솔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데

“뭘 그렇게 뚱하게 쳐다보는가? 이런 내가 자네가 보기에 우수 운 겐가? 그렇다 하더라도 부디 내 청을 물리치지나 말게! 동~상! 동상 자네도 대충은 겪어봐서 알다시피 내 그 애의 앞날만 생각하면 기가 차다네! 나 죽은 뒤에 이 일을 어쩌면 좋나 싶으다네! 머리를 쥐어짜도 대책이 없다네! 자다가도 그 애 생각만 하면 가위에 눌린 듯 정신이 번쩍번쩍 든다네! 등줄기로 식을 땀이 흘러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다네!”하는데 할머니도 오죽하면 이렇겠나 싶어 일말의 동정심이 없잖아 일었지만 그렇다고 선뜻 허락하는 것도 뭣하여

“성~님은 오늘따라 오만 흰소리에 참말 별스럽네요!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줬더니만 보따리 내놓으란 격으로 지가 딸이 없습니까? 아들이 없습니까? 꼴깍 숨넘어가는 손자를 살려주었더니만 이제는 그 어미까지 책임지라니요! 멀쩡한 며느리를 생판 남인 나에게 딸로 삼으라니! 동네, 아니 세상 사람들을 죄다 불러 물어보소!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지? 그리고 오는 데는 순서가 있어도 저승길에는 어디 순서가 있다던 가요!”

“그런데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딸로 삼기 싫으면 그만이지 여기서 죽고 사는 문제는 왜 따지고 그래! 그리고 따지려면 똑바로 따지든가? 저승사자가 눈앞으로 오락가락, 곧장 죽을 늙은이를 두고선! 말이 씨가 된다네! 함부로 그런 말은 입에 올리지 말게! 몹쓸 사람하고는!”하고 말을 줄인 청솔댁이 야속하다는 듯 할머니를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나도 알지! 엎어지면 코가 닿을 만치 가까운 이웃에 사는데 그걸 왜 모르겠나! 늙은 게 야금야금 쌀만 축내는 쥐새끼 모양, 밥 버리지도 아니고, 바보 멍충이(멍청이’의 방언)라도 그만 정도는 알 거네! 나라고 어찌 그만한 자존심조차 없겠나! 그런데도 염치없이 이렇게 어려운 부탁을 마음 놓고 하는 것은 믿을 사람이 자네밖에 없어서 그런다네!”하고는 눈가로 잔잔한 이슬을 보여 소맷자락으로 슬쩍 훔치더니

“다른 사람 눈에는 내 며느리가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아~ 이 사람아 그래도 나는 뭐~ 내 금쪽같은 며느리가 아니 아까운 줄 아는가? 며느리가 딸이 될 수는 없다지만 그래도 그 애는 내 딸자식이나 마찬가지라네! 고부가 이 날수에 우격다짐으로 산천을 얼마나 헤맨 줄 자네는 알기나 아는가? 하지만 어쩌겠나? 아깝다고 마냥 품에 넣어 민주를 부릴 수는 없잖는가? 내 오죽 답답하면 애먼 동생, 자네를 두고 이러겠는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하나 들어준다 생각하고 들어주게!”하고 한숨을 짓더니

“어째 그러는지 모르겠네! 순진하고 착하기는 한데 낄 때, 못 낄 때를 가리지 못해 미움을 살까 그렇다네! 고생, 고생한 뒤에 나아지기는 했다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그런다네! 괜한 오해를 사서 따돌림을 당할까 그러네! 철딱서니 없는 어미 때문에 내 손자, 내 금쪽같은 핏덩이마저 덤으로 미운털이 박혀 구박-덩어리로 찌그러져서 자랄까 그렇지!”

“그 깐 일을 무엇 때문에 걱정하고 자시고 그러세요! 주위가 다 원만한데요! 그리고 꼭 수양딸로 삼아야지만 문지방을 넘어서 아기 어르듯 보살필까요! 이웃하여 산다면 그런 부탁이 없더라도 내 피붙이처럼 여겨 보듬고 살아야지요! 오뉴월 하루 볕이 무섭고, 밥 한 숟갈 무게가 천근이라고! 헛먹은 나잇살이나마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사람이 내리사랑이라고 마음을 내야지요!”

“나잇살 그것도 때로는 다 헛것이여! 늙어 빠져 저승길이 낼 모래인 어느 노망난 노친네(나이든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만 봐도 알조 아닌가? 그날 수록 살아도 철이 안 들기는 천둥벌거숭이 저리로 가라 아니 든가? 그런 게 한 입으로 두말, 세 말 말고 내 딸입네 하고 딸로 여겨 치마폭에 감싸 안게! 내 그래야 마음 놓고 이 두 눈으로 달짝지근하게 흙을 받아 넣지! 철수 아비랑 우리 아들이랑 처남 매부를 하던지, 형님 동생으로 살던지 또 안으로는 올케와 시누이에 자매지간으로 연을 맺던지, 아이들은 없던 고모와 이모를 들먹여 외사촌을 운운하며 오순도순 산다면 오죽이나 좋겠나! 그게 바로 가족이고 한치 건너 한치가 무섭다고 그거이 식구란 힘이 아니겠나! 내 자네 허락하에 그리만 된다면 앉은자리에서 간을 내어 주겠네! 아침 이슬이 더 영롱하다고 늙은이라고 삶에 대한 애착이 어찌 없겠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는데! 일각이라도 더 살고 싶은 욕망을 지닌 것이 인간이란 동물이 아니겠나! 고래 힘줄보다 질기다는 것이 목숨줄이 아니겠나! 그렇더라도 나는 그 애가 이 동네에서 어울렁더울렁 어울려 행복하게 살수만 있다면 눈알을 뽑고, 목을 벤다 한들 무슨 한이 남고 무엇이 두렵고 아까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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