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역사탐방, 수운 최제우의 발자취를 찾아서
대구역사탐방, 수운 최제우의 발자취를 찾아서
  • 노정희 기자
  • 승인 2022.10.3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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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성지 경주 현곡 용담정
동학의 산실 수운 생가
용담정 입구. 노정희 기자
용담정 입구의 포덕문. 노정희 기자

대구역사탐방(단장 오규찬)은 10월 29일 동학의 성지 경주 현곡 용담정에 모였다. 30여 명의 탐방인은 재야 역사학자인 추연창 선생의 해설을 따라 용담정을 거쳐 수운의 태묘와 생가를 둘러보았다.

덕을 펴는 문, 포덕문을 들어서자 수운의 동상이 서슬 퍼렇게 마주한다.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동학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당시 동학은 그 시대의 소망과 염원이 되었다. 서세동점과 삼정문란(三政紊亂)의 위기에서 고통당하던 조선 후기 백성들은 평등과 자유를 외치는 최재우를 따르게 된다.

당시 조선에는 열강의 세력 침투가 시작되었고, 천주교가 들어와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를 본 수운은 천주교에 대항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인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의 근본사상은 ‘인내천’(人乃天)으로, 인본주의를 강조하면서 새롭고 밝은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이었다.

용담정의 수운이 직접 썼다는 거북구(龜)자. 노정희 기자
용담정의 수운이 직접 썼다는 거북구(龜)자. 노정희 기자
추연창 해설사가 흙바닥에 직접 쓴 글자. 노정희 기자
추연창 해설사가 흙바닥에 직접 쓴 글자. 노정희 기자

추 해설사는 수운 선생이 직접 썼다는 '거북구(龜)'자를 흙바닥에 써가며 "모든 것을 볼 때 중심을 가지고 칼 같이 보라."는 뜻이라며 설명해 주었다.

수운은 31세(1854)까지 전국을 유랑하며 다양한 사상을 접하다가, 32세에 우연히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비서(秘書)를 얻어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수운은 기도와 참선으로 지내다 36세가 되어서야 고향 용담으로 돌아와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천사문답(天師問答)’이라고 불리는 하늘님과의 문답 끝에 1860년(철종 11년) 천주 강림의 도를 깨닫고 동학을 창시하게 되었다.

수운의 태묘. 노정희 기자
수운의 태묘. 노정희 기자
수운 묘소 앞의 석물과 추연창 해설사. 노정희 기자
수운 묘소 앞의 석물. 좌측 오규찬 단장, 우측 추연창 해설사. 노정희 기자

추연창 역사학자는 천도교 강령주문을 몇 차례나 주입시켰다. "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하늘의 지극한 기운이 내게 이르렀으니, 하늘님을 모신 나는 스스로 조화를 정하여 평생 잊지 아니하고 하늘의 도에 맞도록 행하겠습니다."

그러나 수운은 동학을 펴기 시작한 지 만 3년도 되지 않은 1863년(철종 14년) 12월에 체포되었고, 이듬해 3월 10일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혔다는 죄(左道亂正之律)’로 대구 경상감영 안의 관덕정(觀德亭) 뜰 앞에서 처형당함으로써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수운의 태묘 앞. 노정희 기자
수운의 태묘 앞. 노정희 기자

수운의 태묘 앞에 이르러 탐방단은 간단한 묵념을 하였다. 태묘 앞의 석물이 100년이 넘었다는 해설가의 설명을 들었다. 

수운의 생가.
수운의 생가. 좌로부터 추연창, 최완식, 김용락 선생. 노정희 기자. 
수운 생가. 노정희 기자
수운 생가. 노정희 기자

수운의 사망 이후 후계 동학 교주는 최시형이 이어받게 되었으며 2대 동학 교주가 되었다. 동학은 후에 천도교로 발전하였다. 수운의 저서로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이 있다.

탐방단. 노정희 기자
왼쪽 뒷줄 하재청 시인. 노정희 기자

이번 탐방에는 창녕의 하재청 시인도 합류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다. 대구역사탐방 오규찬 단장은 " 멀리서 오신 하재청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이은혜 의원의 떡과 과일 찬조, 장운택 명장의 건빵 찬조 등 여러분들이 여러모로 도와주어 행사가 빛났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라며 일정 마무리 인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