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편한 몸이지만 지역사회 봉사 적극 실천
- 현불사 사찰 감정, 모범 감정사례로 인정받아
정기철씨는 40대 초반인 2002년에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 광역의원 출마를 시작으로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김부겸 대구시장 후보의 선대본부 정책팀장, 2016년 ‘수성을’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수성을 지역위원장으로 맹렬히 활동한 바 있다. 이미 정치운동가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다.
1992년 한국감정원 근무를 시작으로 현재 써브 감정평가사 법인에서 감정평가사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2018년도 아내와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기록으로 남겨 최근 수필집≪함께, 그리고 홀로 걷는 길≫(전2권)을 출간한 정기철 씨를 만나 그가 걸어온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 학생 운동했던 때가 궁금합니다.
▶ 정기철 씨는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재학시절부터 학생운동에 몸담아, 6월 항쟁 등에 참여했다. 당시 학내시위 관련으로 강제징집되었던 전형적인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다.
당시를 회상해보면, 관악경찰서 유치장에서 바로 전방부대로 끌려갔는데, 요즘 입대 전에 받는 징병검사나, 일련의 행정절차는 아예 무시되는 시대적 암흑기였었다고 한다.
다만 그동안 최정점을 찍던 민주화 열망은 서서히 그 빛을 드러내고 있었고, 이른바 ‘서울의 봄’ 이후의 시대였다.
1983년 ‘강제징집’되었지만, 1985년 만기 전역까지 충실히 군 복무에 임했고, 전역 후에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아 제적당했다. 경기도 성남의 공장에 취업, 지역 노동운동에 매진했다.
아내는 당시 성신여대 재학 중이었으며, 학생운동 동지로 야학 활동을 하던 중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연애보다는 당시 민주화의 열망으로 함께한 인연이 부부의 연으로 맺어졌다.
정기철(이하 정 씨)씨는 감정평가사로 일을 시작한 계기를, 90년대 시대적 상황과 노동운동의 한계, 앞으로의 시대적 요구가 무엇인지의 고민에서 출발했다.
정 씨는 89년 결혼과 90년 첫 아이 출산으로 가장으로서의 무게와 현실적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냉전체제는 구소련의 ‘고르바초프’가 ‘개방, 개혁’[글라스노스트(Glasnost),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정책을 본격 시행함으로, 서서히 그 종말을 가져오고 있었고, 더불어 그동안의 이념대립은 탈 이데올로기로 이어질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미래의 경제적 상황과 현실에서, 과거의 ‘투쟁성’만을 제일로 삼던 자기 모습으로는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했다.
앞으로의 시대적 요구가 정치적인 역할이 중요할 것으로 생각해 전문역량을 키우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후 정 씨는 부동산전문가가 본인의 적성과 가장 잘 부합한다고 판단하고, 1991년 시험어 합격했다. 92년 한국감정원에서 감정평가사로서 첫 업무를 시작한 이래 지난 30여 년간 감정평가사로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
- 감정평가사는 어떤 업무를 하나요?
▶* 주로 부동산 등 재화의 재산적 가치를 판정하여 가격을 매기는 것이 주 임무
* 보상 감정평가 ~ 신도시 등 공익사업 시행에 따른, 보상 문제에 있어서 보상물에 대한 감정
* 담보 감정평가 ~ 금융기관의 담보대출에 있어서, 담보물에 대한 평가.
* 법사가 감정평가 ~ 법원경매에 있어, 경매 기준가에 대한 감정평가사는 국가 법령 정보 센터이다.
- 감정평가사 30여 년간 보람된 일이나,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요?
▶ 종단 등록을 위한 사찰 감정이 모범감정사례로 선정된 적이 있다.
경북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에 ‘현불사’는 대한불교 ‘불승종’의 사찰이다.
이 사찰은, 고 노태우 대통령, 고 김대중 대통령 등 대권주자들의 대권 승리를 예언한 주지 스님 덕분에 지금도 대권주자들이 꼭 들린다는 후문이 있다.
이 사찰이 처음으로 종단등록을 위한 재산가치 평가를 의뢰한 곳이 한국감정원이었고, 당시 초임자이었던 정 씨에게 배당되었다.
당시 고(古) 목조건축물을 평가한 사례가 전혀 없어 정 씨는, 고건축 전문건축사, 사찰 문화재 담당 공무원, 문화재청 불교 건축 전문가 등 자문 등을 통해, 적산 감정평가 방식의 일종으로 감정가를 선정했다.
이것이 모범사례로 한국감정원 내에서 인정을 받은 바 있다.
또한 고향인 대구에서 지난 20년 전 ‘원스톱 부동산’ 회사를 설립했던 것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한다.
당시 각 분야의 전문가들(변호사, 회계사, 건축사, 공인중개사, 분양전문가 등)과 의기투합하여 회사를 설립했지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금에서야 하는 얘기지만, 회사가 해산되고 몇 년 후,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 제정이 되었다. 본격 재건축, 재개발 등 정비사업이 성행했으며, 조금만 더 회사를 이끌고 나갔으면 아주 큰 특수를 누리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너털웃음으로 대신했다.
지금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전문가들이, 당시에는 40대들로 각자의 분야에서 조직 내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본업에 충실하다 보니 공동목적의 회사는 자연스럽게 해체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웃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 정치는 봉사인가요?
▶ 하지만, 정 씨는 감정평가사업보다 2014년 김부겸 후보의 캠프 참여로, 본격 정치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치는 봉사!’라는 철학에서 그 직을 맡은 것이다.
또한, 정 씨는 ‘수성 사랑회’ 활동을 통해 무료배식 봉사, 공유냉장고 기부 운동, 반찬 식자재 생필품을 필요한 사람들이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하는 등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더불어, 가톨릭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하고 있으며, 가톨릭 신앙생활도 충실하다.
정 씨는 약사인 아들과 변호사인 딸, 학원을 경영하는 아내가 각자의 삶에서 제 역할을 잘하고 있는 것이 삶에서 가장 큰 보람이자, 힘이라고 전한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수호천사가 있어 견뎌낸다고 믿고 있으며, 이는 하루하루가 은총이라는 믿음이, 삶 그 자체를 감사하게 만드는 비결이라고 한다.
- 힘들었을 때가 있었는지요?
▶ 1995년 처음 발병한 암은 스무 번 정도의 수술과 끝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수술이 거듭될수록 팔은 기능을 아예 못할 지경에 까자 이르러, 결국 2021년에 상완부 절단 수술을 받았다.
절망과 좌절이 휘몰아쳤으나 이 또한 견딜 수 있었던 건, 성경 한 구절로부터 얻은 삶이 곧 축복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절단 수술 당일, ‘데살로니카’ 전서의 구절이 문득 눈에 들어와 <모든 일에 감사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라> 는 말대로, ‘삶은 은총’이라 여기는 마음이 지금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민주화 운동에 몸담으며, ‘빈민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던, 고(故) 제정구 선생은 개인적으로는 정 씨의 결혼식 주례를 해준 은인이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정 씨는, 제정구 선생의 ‘<가짐 없는 큰 자유>’라는 철학을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한평생 낮은 곳에서 힘없는 서민들과 함께했고,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검소하게 사신 제정구 선생의 정치철학을 우리 정치권이 아로새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신조는, 주어진 순간에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신념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정부에 하고 싶은 말씀?
▶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사유화시켜 남용하거나, 위임받은 권력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정 씨는 과거 외국 여행을 통해, 여유로운 삶을 사는 외국 3040세대와 현재 우리나라의 3040대 모습을 비교해 보고 너무나 각박한 사회를 만든 기성세대가 그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우리네 삶은 하느님의 선물로 축복된 것이니 우리네 삶과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라는 코헬렛의 가르침을 빌어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전해준다,
6주간의 긴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두 권의<함께 그리고 홀로 걷는 길> 중수필로 남기며, 순례길을 통한 인생의 참된 의미를 노래한 정기철 씨는,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이자 지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