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황현필 '이순신의 바다'
[장서 산책] 황현필 '이순신의 바다'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2.09.24 19:5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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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다는 무엇을 삼켰나

저자 황현필은 전남대학교 사범대와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역사교육학을 공부했고 인문계 고교 교사로 7년간 재직하였다. 이후 학원계로 나와 ‘EBS’와 수능 인강, 공무원 강의 등을 통해 수험 한국사를 가르쳤다. 더욱 대중적인 강의를 하기 위해 유튜브 ‘황현필 한국사’ 채널을 개설하였고 현재 60만 명의 구독자와 함께 즐겁게 한국사를 공부하고 있다. 또한 ‘역사바로잡기연구소’를 설립하고 다양한 분야의 역사 전문가들과 함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이 책은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 ≪이충무공행록≫, ≪징비록≫ 등과 여러 논문들을 참고하여 집필하였고, 이순신이 치른 23번의 전투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 입체그림과 부대 이동 경로를 포함한 총 50여 개의 지도를 수록하여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목차는 ‘1. 출생과 어린 시절, 관직 생활과 준비, 2. 임진왜란 1592~1593, 3. 휴전 1593~1596, 4. 정유재란 1597~1598, 5. 죽음 그 이후 그리고 평가’로 되어 있다.

1. 출생과 혼인, 무과시험 합격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초계 변 씨와 결혼했는데 변 씨는 지방 현감의 딸이었다. 즉 이순신의 외할아버지가 지방의 사또였다. 이순신은 금수저까지는 아니어도 웬만한 집안의 은수저로 태어난 셈이었다. 이정과 부인 변 씨 사이에는 아들 사형제가 있었다. 이정은 아들 4명의 이름을 중국의 선인인 복희씨,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으로부터 차례로 따왔다. 그리하여 첫째가 희신, 둘째가 요신, 셋째가 순신, 넷째가 우신이었다.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 부근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한양의 건천동은 군사훈련장인 훈련원 부근이다 보니, 어린 시절 이순신은 전쟁놀이를 즐겨 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은 항상 대장 역할을 맡았다.

이순신은 청소년기에 외가가 있었던 충남 아산으로 이사하였고, 21세에 같은 아산에 살고 있었던 보성 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순신보다 두 살 어렸던 부인 방 씨는 무남독녀로 재산을 모두 물려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나름 장가를 잘 간 셈이었다. 이순신은 방 씨와 사이에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게 된다.

이순신은 28세에 처음으로 무과 별시에 도전하였으나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낙방하고, 4년 후인 1576년에 치러진 식년 무과에 합격하였다. 식년시는 3년마다 치르는 최고의 과거시험으로 무과는 전국에서 28명을 선발했다. 1576년 당시 식년 무과에는 동점자가 있어 29명이 선발되었고 이순신은 병과 4등(전체 12등)의 준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이순신의 나이 32세였다. 당시 무과 합격자의 평균 나이가 34세였으니 아주 늦은 나이는 아니었다.

2. 거북선을 만들다

거북선의 창안 원리는 간단했다. 조선의 주력선인 판옥선에 덮개 즉 지붕을 씌워 일본군의 등선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적군이 지붕에 올라타지 못하도록 표면에 쇠못을 박고 칼을 꽂았다. 또한 일본군의 화공에 대비하여 거북선의 지붕에 철갑을 둘렀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판옥선에 지붕을 씌웠으니 거북선이 빠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튼튼했고 거북선 내 포수와 사수들에 대한 보호가 가능하였다.

거북선의 형태에 대해서는 완전히 단언하기 힘들다. 앞에 달려 있는 거북선 머리에서는 대포가 쏘아졌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용머리 안에서 유황을 태워 용이 연기를 뿜는 것처럼 보여 적에게 공포감을 유도했다는 주장도 있다.

거북선의 구조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오랫동안 2층설과 3층설이 대립했다. 2층설은 포와 노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주장이고, 3층설은 포를 쏘는 층과 노를 젓는 층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거북선이 적진을 돌파하면서 동시에 포를 쏘았던 것으로 보아. 최근에는 3층설이 굳어가는 추세이다.

여하튼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전투선인 거북선이 실제로 만들어졌고, 1592년 4월 12일에는 거북선의 진수식도 완전히 끝마쳤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다음날인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은 조선을 침략했다.

3. 옥포해전

옥포에 정박해 있는 일본 함대의 총사령관은 도도 다카토라였다. 도도 다카토라가 옥포에서 50척의 함대를 정박시키고 노략질을 하고 있을 때, 슬그머니 뒤를 밟은 우리 포작선들이 그들을 찾아낸 것이었다. 일본군들은 화들짝 놀랐다. 조선 침략 후 조선의 전함을 1척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의 주력선인 판옥선 28척과 협선, 포작선까지 100여 척의 함대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니, 일본군 입장에서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육지에서 노략질에 바쁘던 일본군들이 부랴부랴 자신들의 전투선에 올라탔다. 전투 태세는 늦었지만 일본군들은 조선 수군을 보고도 두려움을 느끼는 기색이 없었다. 자신들에게는 신무기 조총이 있었고, 조총 소리만 듣고도 도망갈 조선군들이 뻔히 예상되었다. 백병전이 전개된다 하더라도 조선군들이 자신들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적선에 기어올라 칼부림을 벌여 상대의 배를 불태우는 등선육박전술이 일본 해전의 역사였고, 동북아 바다를 장악했던 일본군의 해전 전투방식이었다.

“쾅!” 그때 천지를 울리는 굉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무언가가 일본의 전함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일본도를 꼬나들고 한껏 집중하여 백병전을 준비하던 일본군들은 혼비백산했다. 조총의 사정거리 바깥에서 총알 수백 배 크기의 포탄이 자신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으니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주변의 동료들이 포탄에 맞아 머리가 으깨지고 뼈가 골절되어 쓰러졌다. 포탄을 피하면 포탄이 배의 갑판을 뚫고 밑바닥까지 구멍을 내어 바닷물이 차오르는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여기저기서 공포에 질린 탄성과 신음 소리, 살려 달라는 절규, 총을 쏠 수도 없고 허공에 대고 칼질을 할 수도 없는, 일본군 입장에서는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쏟아지는 포탄을 피하기에 바빴고 배에 차오르는 바닷물을 퍼내기에 급급하였다.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호령했다. “특공선단 앞으로!” 그러자 협선들이 빠른 속도로 궤멸 직전의 일본군을 향해 전진했다. 일본 함대에 가까이 접근한 협선들은 불화살을 날렸다. 조선군들의 불화살 융단폭격을 맞은 일본군들은 온몸에 불이 엉겨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 뛰어들었고, 허우적대며 죽어갔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일본의 전함들은 옥포만을 빠져나가기 위한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였다. 도도 다카토라는 20여 척의 함선과 함께 연안을 끼고 도망하였다. 이순신은 도망치는 적을 쫓기보다 눈앞에 있는 적선을 1척이라도 더 부수고 싶었다. 그렇게 옥포 앞바다에서는 일본의 전함 26척이 불타거나 수장되었고 일본군 4,080명이 사망하였다.

4. 파직

많은 사람들이 원균의 모함 탓에 이순신이 파직당했고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고 알고들 있다. 정확히 맞는 말이다. 바로 원균의 장계가 이순신 백의종군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다음은 원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이다. ‘다만 수륙의 일을 헤아려 말한다면 우리나라의 위무는 오로지 수군에 달려 있습니다. (중략) 원하건대 조정에서 수군으로서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원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이제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우러러 아룁니다.’≪선조실록 1597년 1월 22일≫

원균의 속셈은 뻔했다. 이순신 대신 자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준다면 주상 전하의 뜻을 받들어 부산 앞바다에 나아가 대마도발 가토의 증원군과 보급품을 막아 우리 수군의 위엄을 보이겠노라는 것이었다.

원균의 장계가 있고 며칠 뒤, 이번에는 윤두수가 한술 더 뜬다. ‘이순신의 죄상은 임금께서도 통촉하시지만 이번 일은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해 하고 있으니, (중략)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시켜야 할 듯합니다.’≪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원균은 윤두수와 사돈지간이었고, 윤두수는 선조와 사돈관계였다.

급기야 이순신에 대한 파직 명령이 내려졌다. ‘이순신을 잡아올 때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 보내라. 또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여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올 것도 말해 보내라.’≪선조실록 1597년 2월 6일≫ 선조는 혹시 모를 이순신의 반발을 분명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순신을 파직하기 전에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미리 원균을 임명하는 꼼꼼함을 보였다.

한양으로 끌려온 이순신은 의금부에 구금되었다. 선조에게는 이순신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다. 이순신이 의금부에 갇혔을 때 얼마큼의 고초를 당했을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라’고 명령한 선조의 기록을 보았을 때 상당한 시련을 겪었을 것이다.

5. 아들의 죽음

일본군은 명량에서 패배한 복수를 이순신 가족에게 대신했다. 이순신의 본가와 아산 마을 전체가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 과정에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이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국가를 보호하였지만, 제 가족은 지키지 못하였다. 셋째 아들 이면은 담력이 있고 활을 잘 쏘는 등 무인적 기질이 다분하였다. 이순신으로서는 자신의 뒤를 잇는 무장으로 각별히 기대했던 아들이었다. 이순신은 면의 죽음 소식에 비통함을 일기에 남겼다.

‘저녁에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거칠게 겉봉을 뜯고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면이 적과 싸우다 죽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이순신도 한 가정의 아버지였다. 자식을 잃은 아픔이 하룻밤으로 치유될 리 만무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가 이순신뿐이었으랴. 이순신은 부하들 앞에서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이 책을 통해 이순신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그 일생과 7년간의 전쟁에 대한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고려말 왜구부터 동북아 바다를 주름잡던 최강 일본의 수군이 조선 수군의 사령관 이순신에게 최악의 연패를 당한 이유를 알 수 있고, 이순신을 힘들게 했던 임금 선조와 빌런의 대명사 원균, 류성룡과 윤두수, 이원익, 그리고 권율과 곽재우 등 7년의 전쟁 중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인간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에 대한 자살설, 은둔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박을 통해 후세에도 영웅으로 기억되는 이순신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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