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권경률 '모함의 나라'
[장서 산책] 권경률 '모함의 나라'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2.08.21 08: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왜구를 벤 칼로 이성계를 참하리라

저자 권경률은 서강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월간중앙>에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2020년 4월~2022년 3월)에 이어 현재 ‘노래하는 한국사’(2022년 4월~)를 연재하고 있다.

이 책은 ‘역사 이야기’다. 실존 인물 김종연을 주인공 삼아 왕조 교체의 비사를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 건국 세력이 편찬했기에 고려 말의 충신들을 의도적으로 지우거나 왜곡했다. 잃어버린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사료에 근거하되 상상의 인물과 행적, 비밀 결사를 지어내 패자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목차는 ‘1부 왜구 전쟁, 2부 비밀 결사, 3부 잊힌 무인들, 4부 호랑이 등에 탄 역사’로 되어 있다.

김종연의 집안은 광산(光山)을 본관으로 삼고 무신정권 때 조정에 입지를 다졌다. 공민왕 21년(1372) 5월 김종연은 스물다섯의 나이로 낭장(郎將, 정6품)이 되어 강릉으로 향했다. 9월에 왜구가 동해안을 덮쳤다. 김종연 부대는 강릉에 침입한 왜구에게 패주하였으나, 강릉부 관노 이옥의 활약으로 왜구를 물리쳤다.

1376년 9월 왜구의 침입으로 전주가 함락되었다. 그해 10월에는 왜적이 부령(무안)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김종연의 명을 받은 탐망꾼들이 보고한 것이다. 도지휘사 변안열이 청룡도를 집어들고 적진 한복판으로 돌격했다. 그 용맹한 기세에 적의 전열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청룡도를 힘차게 휘두를 때마다 왜구들이 우수수 나가떨어졌다.

고려 군부에서는 김종연의 작전 능력을 높이 평가해 장군으로 키우려 했다. 4년 전 무관으로 전장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왜구와 치열하게 싸웠다. 그 현장 경험을 발판삼아 도약을 앞두게 되었다. 김종연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부하들을 지키려면 무엇보다 왜구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본에서 통신사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나흥유를 찾아갔다.

나흥유는 여주 백애촌에서 학당을 열고 제자를 기르고 있었다. 김종연은 나흥유의 제자가 되었다. 나흥유는 고려 왕궁부터 규슈 태재부까지 첩자들을 배치하여 곳곳에 정보망을 구축한 파사계(婆娑契)의 계주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왜적을 물리칠 장수들을 물색했다. 각지의 세력가들이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그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동북면의 바투’ 이성계였다. ‘바투’는 몽골어로 ‘무적의 용사’를 뜻한다. 그의 고조부 이안사는 전주에서 죄를 짓고 두만강 너머로 도망쳐 원나라에 투항했다. 이후 대대로 원나라 벼슬을 지내다가 1356년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략할 때 큰 공을 세워 다시 고려로 귀순한 집안이다.

이성계는 본거지 함흥에 2,000여 명의 가병(家兵)을 두었다. 그들은 농사 짓고 전쟁에 나서며 이 씨 집안을 굳세게 뒷받침했다. 그 저력으로 이성계는 홍건적, 나하추, 여진족 등과 싸워 이겼다. 이제 북방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었다. 고려 조정은 동북면의 바투를 원수로 임명해 왜적을 막도록 했다. 이성계는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쳐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었다.

김종연은 중랑장에서 장군(정4품)으로 승진했다. 독립적인 부대를 지휘하는 장수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나흥유는 최영, 양백연, 변안열 등 군부 실력자들에게 손을 썼다. 파사계로부터 정보를 받아 왜적과의 싸움에 활용하는 고려의 맹장들이다. 그들은 김종연의 작전 능력과 실전 경험을 높이 평가하여 후원자를 자처했다.

김종연은 위화도 회군 직전 최영의 명으로 고려를 습격한 왜구를 토벌하러 갔다. 전장에서 급보를 받고 그는 망연자실했다. 이성계가 회군을 빙자한 군사 반란을 일으켰고, 최영은 시가전을 벌인 끝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성계의 책사 정도전은 무인들의 활약을 경계했다. 그들은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무인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첫 번째 표적은 최영 장군이었다. 1388년 11월 최영은 개경 순군옥으로 끌려와 국문에 회부되었다. 급진파 사대부는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대간과 전법사에서 연일 처형을 촉구했다. 그해 12월 창왕은 하는 수 없이 최영을 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389년 2월 고려 함선 100척이 합포를 출발해 쓰시마로 향했다. 4명의 원수가 군사 8,000여 명을 거느리고 쳐들어갔다. 경상도 원수 박위가 중군을 통솔했고 원수 최칠석과 박자안이 각각 좌‧우군을 맡았다. 전라도 원수 김종연은 쓰시마 원정에서 별동대를 지휘해 특수 임무를 수행하였다.

정벌군은 의기양양하게 개선했다. 승전보고와 함께 논공행상이 이뤄졌다. 누가 보더라도 최대 공로자는 김종연이었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는 애써 무시하고 총사령관 박위에게 공을 돌렸다. 김종연은 최영의 참모 노릇을 하며 변안열, 정지와 뜻을 같이했다. 정도전 등 이성계의 막료들은 그를 요주의 인물로 찍고 있었다. 쓰시마 정벌에서의 경이로운 활약은 오히려 김종연의 운명에 잿빛 그림자를 드리웠다.

김종연은 나흥유가 죽은 후 새로 파사계주가 되었다. 나흥유의 품에서 유서가 나왔는데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파사계는 만수산 두문동에서 회합을 열고 새 계주를 추인했다. 계원들의 수는 1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변안열은 이성계 일파로서는 확실히 제거해야 할 군벌이었다. 그가 거느린 2만여 명의 사병은 장차 역성혁명의 걸림돌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성석린, 윤소종, 오사충 등 대간들이 집요하게 거사 모의를 물고 늘어졌다. “변안열이 신우(우왕)를 다시 맞아들여 왕 씨의 제사를 영원히 끊으려 했다”는 것이었다. 공양왕은 그의 관직을 삭탈하고 한양으로 유배 보냈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가 이 정도로 봐줄 리 없었다. 변안열을 처형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공양왕은 한양부윤 김백흥에게 “국문하지 말고 죽이라”는 첩지를 내렸다.

변안열은 원나라 무과에서 장원을 했으나 공민왕의 사람이 되어 고려에 충성한 무인이었다. 왜구, 홍건적 제주 목호 등과 싸워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명장이었다. 외침을 막고 고려를 수호한 공신은 1390년 1월 어이없이 최후를 맞았다.

변안열은 죽었지만, 옥사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이성계 일파는 그의 측근들을 고문하고 김저의 공술을 보태 정적들을 모조리 죄인 명부에 올렸다. 가장 억울하고 안타까운 것은 무인들이었다. 정지, 왕안덕, 우인열 등 왜구 토벌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수들이 옥사의 덫에 걸렸다.

1390년 5월 1일 동지밀직사사 조반이 사신으로 남경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바로 ‘윤이와 이초의 무고사건’이었다. “고려의 시중 이성계가 왕요를 군주로 세웠습니다. 왕요는 왕실의 친족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척입니다. 왕요가 이 시중(이성계)과 모의해 병마로써 상국(上國, 명나라)를 범하려고 했습니다.” 윤이의 글에는 김종연의 이름도 있었다. 김종연은 그 내막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성계 일파는 앞서 명나라와 짜고 우왕과 창왕을 신 씨로 몰아 임금을 갈아치웠다. 필시 고려에 친명 사대 정권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거래했을 것이다. 이번에도 윤이와 이초를 보내 짐짓 고변하게 하고 명나라에서 무고로 규정해 처벌의 명분을 제공한 것으로 보였다. 윤이의 글에 나오는 명단은 이성계 일파가 껄끄러워하는 정적과 장수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 무고 사건은 조작극이 분명했다.

5월 6일 김종연이 집을 비운 사이에 순군이 그를 붙잡으러 들이닥쳤다.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무리 찾아도 모습이 안 보이자 정당문학 정도전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눈치를 챈 것일까? 삼봉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심복 한거정에게 일렀다. “김종연이 비겁하게 도망갔다. 사헌부에 이것이 무고 사건에 연루된 증좌라고 전하라.” 윤이의 글에 나오는 자가 도망간 것으로 무고 사건이 실체가 있다고 우길 심산이었다. 이게 통하면 다른 자들도 도망치기 전에 얼른 잡아들여야 한다는 공론을 일으킬 수 있었다.

드디어 큰 옥사가 일어났다. 우현보, 권중화, 경보, 장하, 홍인계, 윤유린 등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옥리가 먼저 윤이의 사촌형 윤유린을 혹독하게 국문했다. 공술에 따라 최공철, 최칠석, 조언, 조경, 공의, 한성, 김충 등을 줄줄이 잡아넣었다. 이미 각지에 유배 중이던 이색, 이림, 우인렬, 정지, 이숭인, 권근, 이종학, 이귀생, 이인민 등도 청주옥으로 압송했다. 끔찍한 고문이 감옥마다 벌어졌고, 처절한 비명이 온 나라에 가득했다.

김종연은 봉산 관아의 군사들에게 체포되어 개경으로 압송되었다. 대간과 옥리들이 야차같이 덤벼들어 국문을 벌였다. 명나라에 이성계를 무고한 원흉임을 자백하라고 윽박질렀다. 모진 고문이 계속되었지만,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날 밤, 김종연은 변소 구멍을 통해 감옥을 빠져나갔다.

파사계주 김종연이 평양에 들어간 것은 8월 하순의 일이었다. 권격의 집으로 핵심 계원들을 불러 회동했다. 9월에 한양으로 천도하면 국왕과 대신들을 포섭하고 이성계를 비밀리에 제거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곧이어 남북에서 병력을 움직여 그의 일파와 군단을 일거에 섬멸하기로 했다. 1390년 9월 17일 공양왕은 한양 천도를 단행했다.

파사계주는 평양에 은신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성계 일파를 칠 준비에 돌입했다. 한양 천도로 임금을 저들의 손아귀에서 빼냈다. 이제 이성계 군단에 맞설 연합군을 조직할 때다. 김종연은 정치적인 세력 규합보다 군세를 구축하는게 시급하다고 보고 군심을 먼저 공략했다. 이성계 일파와 맞짱뜨려면 무력이 받쳐줘야 했다. 김종연은 조유와 권격을 움직여 무인들을 거사에 끌어들였다. 저들이 죄 없는 장수들을 많이 해쳤기에 호응이 잇달았다. 반이성계 연합군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파사계주는 거사일을 팔관회가 벌어지는 11월 15일로 정했다. 나흥유가 변안열에게 거병을 권한 날짜였다. 그러나 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윤구택으로부터 거사 계획을 들은 양백지가 이성계에게 고변했기 때문이다. 도망자 김종연이 판사 조유와 모의해 이 시중을 치려 한다는 제보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모의에 가담한 자들이 워낙 거물급 인사들이었기 때문이다.

12월 중순 파사계주는 곡산의 험준한 산길을 헤매고 있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자꾸 헛것이 보였다. 수풀에 웅크리고 잠시 눈을 감았는데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쳤다. 도망자의 몸은 순식간에 폭설에 파묻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 사냥꾼이 김종연을 발견했다. 그는 갖고 다니던 담비 가죽을 김종연에게 덮어주고 술도 한 모금 먹였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순군진무 임순례가 와 있었다.

김종연은 1390년 12월 16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며칠 후 그의 사지는 갈가리 찢겨 여러 도에 내걸렸다. 권격 등 공모자 7인도 참수당했다. 이성계 일파는 1390년 윤이와 이초의 무고 사건으로 김종연, 최공철, 홍인계, 윤유린 등 유력한 장수들을 제거했다. 또 김종연과 조유의 변란 음모에 심덕부, 지용기, 박위 등 무장 출신 공신들을 엮어 무력화시켰다. 이를 계기로 원수 인장을 회수해 무인들의 독립적인 지휘권을 박탈했다.

이듬해 1월 군제 개편이 단행되었다. 5군을 줄여 3군으로 하고 도총제부에서 서울과 지방의 군사를 모두 통솔하게 했다. 이성계는 도총제사, 배극렴은 중군총제사, 조준은 좌군총제사, 정도전은 우군총제사에 올라 이성계 일파가 군권을 완벽히 장악했다. 역성혁명의 실질적 기반이었다. 2월에 공양왕은 한양에서 개경으로 다시 천도했다.

끝내 붙잡혀 죽었으니 김종연은 역사의 패자라고 볼 수 있다. 승자가 붓을 쥔 역사에서 패자의 진실은 묘비도 없이 세월에 묻힌다. 하지만 패자가 죄를 입었다고 해서 그 뜻이 허망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또 승자가 뜻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승자의 역사는 찬란한 기록으로 남지만, 패자의 역사는 사무쳐 가슴에 울린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