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노트] 유럽의 서쪽 끝, 최초의 해양제국 포르투갈
[여행노트] 유럽의 서쪽 끝, 최초의 해양제국 포르투갈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2.08.1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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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유럽의 서쪽 끝 변방의 포르투갈은 인도항로를 개척하고 대서양을 통한 향신료무역 등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곳곳에 식민지까지 개척하며 인류 항해사를 새로 쓴 나라
대항해시대 리스본의 상징 '발렝탑'  '바스코 다 가마'의 원정을 기념해 만든 요새이자 등대. 강지윤 기자
대항해시대 리스본의 상징 '발렝탑' '바스코 다 가마'의 원정을 기념해 만든 요새이자 등대. 강지윤 기자

세계지도에서 보면 아시아의 동쪽끝 한국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유럽의 나라는 유라시아 서쪽끝 이베리아 반도의 조그만 나라 포르투갈이다. 인천공항에서 터키의 이스탄불까지 거의 12시간 환승을 하고 다시 포르투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다섯 시간이다. 집 문밖을 나서 목적지까지 가는데 거진 하루가 걸리는 셈이다. 대한민국보다 조금 작은 나라 포르투갈, 유럽의 변방이었으나 최초의 해양제국으로 온 세상을 주름잡았던 이들은 어떻게 바다로 나아가 세계해상무역의 주역이 되었던 것일까?

15세기초 해양무역의 주도권은 중국과 이슬람 세계가 쥐고 있었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며 지중해를 통한 동방무역 통로를 장악하자, 유럽인들은 대서양을 통해 인도로 가는 우회로를 찾고 있었다.

대지진후 재건한 계획도시  리스본의 면모를 보여주는 상업지구에는 관광객과시민들로 늘 붐빈다. 강지윤 기자
대지진후 재건한 계획 도시 리스본의 면모를 보여주는 상업지구는 늘 관광객과 시민들로 붐빈다. 강지윤 기자

500여 년 전 포르투갈은 겨우 인구 100만의 유럽의 변방이었다. 이탈리아 출신 뱃사람으로 포르투갈에서 ‘바스코 다 가마’와 쌍벽을 이루던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대담한 구상을 제시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정부는 심사숙고 끝에 지원을 거절했다. 그후 콜럼버스는 카스티야왕국 ‘이사벨 여왕’의 지원을 받아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여 유럽인들이 이곳을 개발, 정착하는 계기를 만든다.

포르투갈은 대서양 남쪽으로 내려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하려 했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는 4척의 배에 선원과 군인, 통역, 선교사, 지도전문가 등을 태우고 ‘리스본’항을 출발했다. 순풍에 돛을 달고 남하한 함대는 무사히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았다. 그곳으로부터 아프리카 동해안을 따라 올라간 뒤 인도양을 따라 인도로 항해했다. 3차례에 걸친 대장정 끝에 인도에 다다랐으며 ’바스코 다 가마‘는 유럽인들이 학수고대하던 인도항로 발견에 성공했다.

포르투갈 북부의 항구도시 '포르투'를 가로지르는  도루강변의 모습.오래 전부터 와인을 실어나르던  배의 모습과  철교가 그림 같다. 강지윤 기자
포르투갈 북부의 항구도시 '포르투'를 가로지르는 도루강변의 모습. 오래 전부터 와인을 실어나르던 배의 모습과 철교가 그림 같다. 강지윤 기자

이로써 유럽인들은 이슬람 상인들을 거치지 않고 향신료를 비롯한 동양의 진귀한 특산품을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 1492년의 아메리카 항로 발견과 1498년의 인도항로 발견은 유럽의 주교역로를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겼다. 막대한 부가 보장되는 대서양 무역에서 소외된 지중해 국가들은 쇠퇴한 반면, 대서양 연안의 에스파냐(스페인), 포르투갈, 잉글랜드 등이 유럽의 신흥 부국으로 떠오른다. 또 대서양 항로를 따라 유럽인들의 해외진출이 급증하면서 세계사의 판도가 급변한다.

포르투갈은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곳곳에 식민지까지 개척하며 인류항해사를 새로 쓴 나라였다. 그 밑바탕에는 담대하고 창의적인 생각으로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대항해시대를 열어간 선각자 ‘엔리크 항해왕자’(1394~1466)가 있었다. 모든 사람이 육지를 바라볼 때 바다를 바라본 남자. 해양연구소를 만들고, 선박진로술, 항해술, 천체관측술 등 지식과 기술을 모으고 해양전문가를 양성한 그는 지중해 무역의 변방에 있던 포르투갈이 살 길은 먼 바다로 나아가 신항로를 개척하고 대항해 시대를 열어가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스도 수도원 내부의 독특한 기둥이 천장으로  이어진다. 강지윤 기자
그리스도 수도원 내부의 독특한 기둥은 천장으로 이어진다. 강지윤 기자

1415년 북아프리카 ‘세우타’를 정복해 아프리카 탐험의 거점으로 삼으면서 대항해시대로 알려진 포르투갈의 해외진출이 시작된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바로톨로메오 디아스’는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과 인도양이 이어져 있음을 증명했으며, ‘페드루 카브랄’은 브라질을 발견했고 ‘마젤란’은 조국으로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세계일주를 했다.

포르투갈은 1480년대부터 100여 년 동안 황금기를 구가했다. 육류를 주식으로 하는 유럽인들에게 ‘천국의 알갱이’로 불리며 풍미와 보존 기간을 늘려주던 동양의 향신료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의 향신료무역은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고, ‘마누엘 1세’ 통치 시기에는 남아메리카와 동양으로의 항로와 육지를 발견하고 1530년 ‘동주앙3세’는 브라질의 식민지화를 시작한다. 그러나 1578년 모로코 정복에 나선 왕과 귀족이 전투에서 대패하며 혼란에 빠지고 스페인에 합병되고 만다. 외교권을 상실하고 인도양 독점 무역권이 깨지면서 퇴보의 길로 들어선다. 그후 1668년, 포르투갈 귀족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알파마 지구로 올라가는 전차는 언제나 만원이다.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광과 골목마다 숨겨진 오래된 얘기들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지윤 기자
알파마 지구로 올라가는 전차는 언제나 만원이다.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광과 골목마다 숨겨진 오래된 얘기들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지윤 기자

15~17세기 대항해시대 탐험의 결과로 포르투갈은 유럽세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경제, 사회, 군사적으로 가장 강대한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포르투갈은 1415년 세우타 정복부터 1999년 마카오의 중국반환까지 거의 600여 년 동안 이어진 식민지 제국이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브라질 독립이후 크게 영향력이 줄었다. 40여 년 계속된 군부독재가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이후 민주주의로 바뀌었고,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 종식되어 아프리카의 모잠비크, 앙골라 등이 독립하게 된다.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아줄레주'(채색 타일)로 그려 놓은 벽화들을 보는 즐거움도 놓칠 수 없다.  강지윤 기자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아줄레주'(채색 타일)로 그려 놓은 벽화들을 보는 즐거움도 놓칠 수 없다. 강지윤 기자

 

오늘날 포르투갈은 1인당 GDP가 낮지만 선진국 중 하나로 여겨지며 삶의 질은 19위로, 세계 최강수준의 의료 시스템을 가지고 있고 가장 세계화되고 평화로운 나라에 속한다. 현재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에도 가입되어 있다. 포르투 와인과 에그타르트, 리스본의 뒷골목에서 듣는 파두음악과 구식 전차, 한때 번성했던 제국의 흔적을 보며 느끼게되는 애잔함, 그러면서도 싼 물가, 이러한 모든것들이 여행자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