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75)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하였던 통일벼 3
[꽃 피어날 추억] (75)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하였던 통일벼 3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2.08.23 13:2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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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벼가 배고픔의 고통을 해결하고 20년만에 사라졌다. 통일벼의 신화가 아프리카에서 다시 살아 났다.
1972년 첫 재배를 하여 배고픔을 해결하고 20년만인 1992년에 사라진 통일벼.

 

올해는 우리가 1972년 통일벼를 첫 재배를 하고 50년이 되는 해이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하듯 첫 해 통일벼 재배 실패한 지역의 면적 확대는 어려움이 많았다.

77년 8월 중순에 청도로 이동되었을 때 일반벼를 재배하는 포장이 많았다. 중생종 벼는 출수가 시작되었다. 신품종 ‘래경’ ‘노풍’은 육종가의 이름을 따서 품종명을 명명하여 기대가 큰 품종이었다. 통일계통 벼에는 도열병이 안 걸렸는데, ‘래경’ ‘노풍’에 목도열병이 발생하는 이변이 생겼다. 장려품종에서 제외되었다.

청도군의 통일벼 재배면적 확대가 어려운 것은 첫해인 72년 6월 하순에 늦게 모내기하여 농사를 망쳤기 때문이었다. 78년 3월 중순 청도군청에서 통일벼 면적 확대를 위한 행정지도 공무원 1인당 1부락을 지정하였다. 4월 1일 새벽 5시에 전 직원들이 군청에서 만나 군수의 지시를 받고 담당 부락으로 출발하였다. 상주에서는 72년부터 5년 동안 통일벼 면적 확대 때문에 겪어보지 못한 일을 하게 되었다. 리장을 만나 보급종 종자를 구입한 농가를 다니며 통일벼 볍씨 소독 및 침종에 대하여 지도를 하였다. 처음에는 협조를 잘하였다. 통일벼 종자를 침종하고 이튿날 가보면 통일벼 종자는 건져내고 일반벼 종자를 침종해 놓은 상태였다. 공무원하고 농가의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통일벼 침종 결과를 매일 보고 하는데 고역이었다.

상주 모서 지역도 산골짝이고 면 소재지가 해발 240m로 지대가 높은 곳이다. 1모작 통일벼 재배에 성공하였다는 상주의 성공사례를 이야기하여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10여 일 만에 리장, 지도자를 설득하였다. 6월 초에 모내기, 8월 하순에 통일벼가 출수하였고 10월 중순에 수확 타작을 하였는데, 동민들이 보고 놀랐다.

 

78년 가을 부산에서 직원들 단합대회. 유병길 기자

79년 3월에는 72년 통일벼 보급과 같이 태어난 아기가 청도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제 전국적으로 통일벼 재배 면적도 확대 되었고, 주곡이 자급되어 농촌도 잘살게 되었다. 그러나 첫 해에 실패한 일부 지역인 청도군은 통일벼 재배 면적 확대에 총력 지도를 하였다.

4월 초부터 담당 부락에 매일 새벽 출장을 나가 통일벼 종자 침종 지도를 하였다. 어느날  리장 부인이 '중매를 서고 싶다'고 하였다. 허허 웃으며 '아들이 초등학생입니다.' 한바탕 웃은 일도 있었다. 본인들이 양식할 논에는 일반벼 종자를 침종하고, 수매 할 논에는 통일벼 종자를 침종 하여 면적 확대를 하였다.

이서면에 기계 모내기 첫 시범단지를 선정하였다. 상자에서 모를 키워 이앙기로 모내기하는 새로운 영농기술의 농법이다. 반신반의하는 회원들이 많아 설득하는데 어러움이 많았다. 30일 키운 10여cm 정도의 상자 모를 이앙기에 올리고 앞으로 나가며 모를 심었다. 구경나온 많은 사람들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논을 다 비운다.”“저 집 올해 농사 망친다.” 등 말이 많았다. 45일 키운 20여cm 일반 모는 모내기하고 돌아서면 논이 푸르게 어울렸는데, 기계모를 심은 논은 논이 빈 것 같이 보였다. 가지치기를 많이 하면서 논이 어울리니까 회장도 “이제야 안심이 된다.” 하였다.

 

기계 모내기 못자리 설치 연시대회. 유병길 기자

기계화 영농의 꽃을 피우다.

79년 10월 달성군으로 이동되었고, 80년에 첫 기계 모내기 시범단지 3개소를 선정 보급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상토의 산도 교정 등 준비는 다소 까다롭지만, 기계 모내기는 우리 농업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 보급된 보행 이앙기 모내기 모습. 유병길 기자

농가에서는 벼농사가 한해의 큰 농사이기 때문에 관행 농법을 바꾸는 새로운 농법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을의 지도자들이 농촌지도사의 말을 믿고 따라 주었다. 통일벼 재배가 그랬었고, 기계 모내기도 손으로 모내기 한 것과 수량 차이가 없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이앙기를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며 힘들었던 손모내기 시대가 90년 대에 막을 내렸다.

"배가 고픈 사람은 한 가지 걱정이 있지만, 배가 부른 사람은 만 가지 걱정이 있다". “말 타면 종을 두고 싶다”는 속담이 있듯이 배가 부르자, 80년대 하반기부터 민감한 세 치 혀끝은 밥맛을 따지게 되어 통일계통 쌀을 기피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농진청 산하 작물시험장에서는 수량 많고 밥맛 좋은 일반계 품종 육종에 총력을 기울여 일품벼 등 우수 품종을 육종하였다.

기계 모내기가 시작되면서 벼농사의 기계화는 급속하게 성장되었다. 면단위에 기계화 영농단을 조직하였고, 벼 위탁 회사를 설립하였다. 국비 지방비 보조가 있어 승용이앙기, 트렉터, 콤바인을 공동 구입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 특성상 공동 작업및 운영은 어려움이 많아 농기계를 개인이 관리하는 방향, 즉 개인별 영농단, 개인 위탁영농회사가 되었다. 또 결점이 더 있다면 농기구 자가 소유욕이다. 콤바인이 있는 사람에게 벼를 베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희망하는 날에 수확을 할수 없게되자 2~3일만 사용하고 일 년 내내 세워 놓아야 할 콤바인, 트렉터, 승용이앙기 등을 농협 융자로 구입하다보니, 농가의 빚은 늘어만 갔다. 

우리나라 주곡의 자급자족에 기여한 공로로 역사에 길이 남을 통일계통 벼는 92년 자취를 감추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큰 업적인 통일벼의 신화가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이스리(ISRIZ)'로 다시 살아났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듯, 통일벼의 신화가 그 뒤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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