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유현정 '나의 종이들'
[장서 산책] 유현정 '나의 종이들'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2.08.14 09: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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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고 사적인 종이 연대기

저자 유현정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소비자학과 미술사학을 복수 전공했고, <포브스코리아>와 <월간중앙>에서 기자로 일했다. 몇 년 전 고향인 대전으로 돌아와 대전역 근처 인쇄 골목에서 작은 인쇄소를 운영하면서 크고 작은 책자들이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을 즐기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의 사소하고 사적인 종이 연대기이다. 종이는 우리 삶에서 매우 흔하며 익숙한 존재다. 자기가 갖고 있는 종이를 관찰하는 일은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행위가 된다. 집에 쌓여 있는 폐지를 살펴보면, 그 주에 내가 무엇을 먹고, 쓰고 생각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나의 책상, 서랍, 책꽂이에 놓인 종이가 내게 어떤 깨달음을 줄지 모른다. 그것이 곁에 잔존하는 이유는 그 사물과 맺어진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 종이를 갖게 된 배경, 그 시간을 함께했던 사람, 그때의 느낌을 회상하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목차는 ‘PART1 종이 속의 나, PART2 수집된 종이들, PART3 감정의 정리, PART4 평온한 관계, PART5 종이의 일상’으로 되어 있다.

1. 타인의 시선

기사를 능숙하게 쓰게 되면서 다른 장르에도 도전했다. 즐겨 보는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의 작법을 익힌다면 무엇이든 잘 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도전했다. 신춘문예에 소설 작품을 응모하고, 드라마 공모전에 대본을 제출했다. 서강대역 근처에서 소설가의 작법 수업을 듣고, 합평을 받고, 수없이 글을 고쳤다.

그러나 수상의 영광은 쉬 돌아오지 않았다. 탈락을 거듭하는 시간이 흐르며 대충 넘겨듣던 지인의 피드백에 더 집중했고, 그러다 내 특징을 깨닫게 됐다. 나에게는 창작자 기질이 부족했고,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일에 둔감했다. 매일 쏟아지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이목을 끄는 것은 차별성이었다. 모두가 공감할 만한 레퍼토리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했다. 오탈자를 그냥 넘기지 않게 되고, 흠 하나 없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시간에 쫓기며 모니터 앞에서 썼던 많은 글이 ‘돈’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작가가 되는 일에 대한 미련이 없는 요즘, 나는 손으로 글쓰기를 즐긴다.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줄을 쫙 긋고 바로 옆에 다시 쓴다. 맞춤법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도 찾아보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니 흐름이 자유롭고 결말도 제멋대로다. 그렇게 완성된 글을 읽다 보면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순간도 있다. 내면에서 튀어나온 의외의 말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손으로 글을 쓰는 시간은 언제나 행복하고, 나는 이내 그 상황을 즐기게 된다. 언젠가 재미있는 글을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분좋은 기대를 품고서.(56~59쪽)

2. 종이 루틴

종이는 나의 깊고 진중한 카운슬러였다. 밖에서 겪은 곤경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꺼려질 때 종이 위에 얘기를 풀어냈다. 종이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며, 나 자신이기도 했다. 나는 필체와 단어를 신중히 골라가며 내 기분을 온전히 그 위에 드러냈다.

감정을 돌이켜보는 시간은 밤이 적절했다. 잠들기 10분 전, 하루 동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고민과 불편했던 감정을 기록하며 해소했다. 고민과 기분 나쁜 것들에 대해 적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전화로 누군가에게 푸념을 늘어놓은 것 이상의 후련함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나의 모든 상황과 단점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일이 쉽지 않아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단순히 고통스러운 하루의 기억만 떠올리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기분 좋은 일도 떠올렸다. 하루 동안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르지 않으면 과거에서 그 조각을 찾았다. 그러다보니 매일 하고 싶은 일이 달라졌다. 세상을 살면서 보는 것들이 많아서일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이라도 일부러 생각해서 글씨로 적었다. 떠올리고자 노력하다 보면 한 명쯤은 생각나기 마련이다. 허겁지겁 엘리베이터로 뛰어가는 나를 기다리며 열림 버튼을 눌러준 낯선 사람, 출근길에 먼저 밝게 인사해주던 경비 아저씨 등을 떠올리며 작은 것에서부터 고마움을 느껴보려고 했다.

감정을 기록하는 일엔 특별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현재 느끼는 감정을 문장으로 표현하면 되었다. 하루 10분의 투자만으로 잠도 깊이 잘 수 있었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잠들면 꿈을 꾸거나 잠을 설치지만, 숙면을 방해하는 요소를 종이 위에 쓰면 곤히 잠들 수 있었다.(138~140쪽)

3. ‘나’를 위해

독서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읽은 책의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전과 달리 같은 책을 두 번 이상 읽는 일은 드물어졌다. 워낙 많은 책이 출시되고, 그만큼 읽고 싶은 책도 많아져서다. 매일 수백 권의 책이 쏟아져 나오는 와중에 내가 어떤 책을 완독했다는 것은 그게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베스트셀러라고 무조건 읽지 않는 내게는 더욱 그렇다.

책을 고르는 나만의 비합리적 방식이 있다. 서점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부스나 소품과 어우러져 메인 공간에 멋지게 전시된 책은 주목하지 않는다. 책꽂이나 평대를 서성이다 끌리는 책을 꺼낸다. 제목이 과장된 느낌이 없고 표지가 심플한 책을 위주로 살펴본다. 내지 종잇장이 너무 얇거나 글자 사이의 간격이 너무 좁은 것은 피한다. 가독성이 떨어져서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것 중 완독한 책만 독서 다이어리에 기록했다. 중도에 읽기를 그만두거나 내용을 스킵해 가면서 읽은 책도 많지만, 그런 것들은 기록하지 않았다.(163~164쪽)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구나 저자처럼 종이에 담긴 과거의 나를 살피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종이를 모으고, 버려진 종이의 쓸모를 찾아 재활용하고, 종이 위에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취미일 수도 있고, 자기 안의 다양한 감정을 어루만지는 화해의 시작일 수도 있으며, 오늘을 살아갈 의미를 찾는 최소한의 노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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