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74)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하였던 통일벼 2
[꽃 피어날 추억] (74)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하였던 통일벼 2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2.08.16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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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벼 재배 면적 확대를 위하여 다수확시상제, 농가 희망량 전량을 추곡 수매로 받아 주었다.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해준 통일벼.

 

기적의 볍씨, 내병 다수성인 통일벼는 50년 전인 1972년 첫 재배된 품종이다.

통일벼란? 인도차이나반도 안남지방에서 생산되는 인디카 벼와 우리나라, 중국, 일본에서 생산되는 자포니카 벼를 서울대학교 허문회 박사가 세계 최초로 교배에 성공하여 두 계통의 장점을 모아 선발한 IR667, 전국에 이름을 공모 통일벼로 명명하였다. 좋은 쌀이란 밥맛이 좋아야 하고, 단위면적당 수량이 많아야 한다. 통일벼는 일반벼보다 밥맛은 떨어졌으나 보리밥보다는 월등하게 밥맛이 좋았고 단위면적당 수량이 높았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배고픔의 고통을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기 위하여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에서 동계증식한 통일벼 종자를 항공화물로 공수하여 보급하게 하였다.

그때 상주시 농업기술센터(농촌지도소)에서 현장을 누비며 지도를 담당한 농촌지도사는 74명이었다. 30대가 많았고 20대, 40대 순으로 구성되었다.

1모작으로 일찍 모내기한 상주지역은 집집마다 다수확 풍작이 되었지만, 2모작으로 6월 하순 이후에 늦게 심은 청도, 경주 등 남부 일부지역은 출수가 늦고 벼가 익지 않는 피해를 보았다. 이 지역은 통일벼 확대 보급에 어려움이 많았다.

72년 말  소장, 작물계장이 농촌진흥청에서 통일벼 재배 교육을 받고, 전 직원에게 전달 교육하였다. 직원들은 갱지 전지로 통일벼 교육용 차드를 만들어 73년 1월부터 마을 회관을 찾아다니며 통일벼 재배 교육을 하였다. 보온절충못자리 설치 시기에는 연시대회를 개최 시범을 보이는 교육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과 김인환 농진청장의 후원, 행정 지도공무원들의 지도로 73년부터 통일벼 재배 면적을 급속도로 늘려나갔다. 통일벼 확대 재배를 하려니 전국적으로 현장 지도할 농촌지도사가 부족하였다. 농업고등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통일벼 증산 요원’을 뽑아  2~3개 읍면에 있던 지소를 읍면단위에 지소를 개소 하였다.

통일벼 재배 면적 확대를 위하여 통일벼 다수확시상제가 농수산부 시책으로 시행되었다. 통일벼다수확 농가 시상은 300평 당 600kg 이상 생산 필지에 10만 원의 시상금을 주었다. 심사의 공정성을 위하여 지도 행정 공무원이 인근 시군과 교환하여 심사하였고, 다음해에는 읍면간 행정 지도 공무원이 교환 심사하였다. 그때 시상금 10만 원은 큰돈이었다. 대한전선에서 나온 흑백 텔레비전 1대 가격이 10여 만원 정도였다.

정부에서 추곡 수매를 많이 받아 주는 시책도 통일벼 재배 면적 확대의 방안이었다. 수매대금으로 돈이 들어오니 수매량이 많은 대농가는 2년마다 논을 사는 사례도 있었다.

첫해부터 통일벼 재배에 성공한 상주시는 지도 행정 공무원이 면적 확대를 권장할 시간도 없이 작년에 재배한 농가에서 종자를 교환하여 농업인들이 자발적으로 면적 확대를 하였다. 작년 가을에 파종하였던 논보리를 갈아엎고 통일벼를 1모작으로 모내기할 정도였다. 일반벼에 피해가 많았던 이삭도열병이 통일벼는 걸리지 않아 좋아하였다.

72~73년 상주시 거의 모든 농촌에 전기가 들어왔다. 약삭빠른 전자제품 대리점에서 추곡 수매 후 대금을 받는 조건으로 텔레비전 달아 주었다. 농가 희망량을 전량 수매를 하였고, 매년 수매 금액도 인상되어 살기 좋은 농촌이 되었다.

 

벼멸구 피해 논의 모습(원안은 벼멸구의 모습). 유병길 기자

75년 추석 무렵 전국의 들판에 벼멸구가 발생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태풍으로 중국에서 날려온 벼멸구가 떨어진 곳에서 증식하여 벼 줄기에 까맣게 붙어 양분을 빨아먹다 보니 논바닥의 벼가 둥그렇게 말라 들어갔다. 젊은 농촌지도사들은 벼멸구를 처음 보았으나, 어른들은 “몰구”라고 하였다. “몰구는 베어 놓은 볏단에 붙어도 피해를 준다.”는 말이 있다고 하였다. 통일벼는 벼 줄기가 굵고 연하여 일반벼보다 피해가 큰 것 같았다. 벼멸구 전용 살충제가 없어 발만 동동 굴러야 하였다. 궁여지책으로 귀한 석유를 물고에 떨구어 논에 퍼지면 막대로 벼 줄기를 흔들어 멸구가 물에 떨어져 석유가 묻어 죽게 하였다. 이후에 벼멸구 전용 약제 밧사가 공급되었다.

이때부터 벼멸구를 적기방제에 방제하기 위하여 긴 장화를 신고 흡충기를 들고 들판의 벼 포기를 헤치며 벼멸구를 예찰하여 행정에 통보하면, 지역단위, 마을단위로 경운기에 부착된 고성능분무기를 동원하여 공동방제를 하였다.

수확기의 통일벼 모습. 볏대가 약하여 베는 시기가 늦으면 고스러졌다.. 유병길 기자

통일벼 재배 면적이 확대되면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보릿고개를 허물고 보리밥 대신 통일 쌀밥을 배부르게 먹을수 있어 행복하였다.

농촌의 삶이 좋아지면서 소비가 늘어나다 보니 도시경제도 발전하여 잘살게 되었다. 중소기업이 늘어나고 공장이 늘어나면서 일자리가 생겨 농촌 청년들이 도시로, 서울로 나가 취직을 하게 되었다.

1972년 4-H 도 단위 심사를 받은 모서지소.(왼쪽부터 고)차광환 지소장, 본인, 고)노귀환 지도사, 이석도 계장, 진흥원 김종환계장, 여회원 2명, 고) 정용식 지도사, 마을지도자). 유병길 기자

통일벼라는 기적의 벼 탄생과 기계화영농을 대비하여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경지정리, 다목적을 댐과 저수지 등을 미리 만들어 수리안전답 비율을 높인 것이 삼위일체가 되어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배고픔의 고통을 주곡의 자급으로 해결하였고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벼는 욕심이 없고 가질만 큼만 가진다. 3~5개가 심어진 한 포기가 가지치기를 하여 많은 포기는 30~40여 개 줄기가 된다. 출수하여 벼알이 완전하게 익을 13~ 18개 줄기만 남기고 약한 줄기는 도태시키는 지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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