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명의 항일 애국지사를 배출한 안동 오미마을
24명의 항일 애국지사를 배출한 안동 오미마을
  • 이동백 기자
  • 승인 2022.08.1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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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련오계(八蓮五桂)의 유서 깊은 마을에서
항일 애국 운동을 불꽃처럼 일으킨 마을로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소재 ‘오미광복운동기념탑’  이동백 기자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소재 ‘오미광복운동기념탑’ 이동백 기자

안동시 풍산읍 오미마을은 풍산 김씨가 600년 세거해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조선 명종 때 김대현 공의 여덟 아들이 모두 소과에 급제하고 그 가운데 다섯이 대과에 급제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자 사람들은 이를 팔련오계라고 하며 이 형제들을 칭송했다. 이 집안에서 일제 강점기에는 죽포 김순흠 선생, 추강 김지섭 선생, 근전 김재봉 선생 같은 많은 항일 애국지사들이 나왔다.

죽포 김순흠 선생은 일제에 의해 1907년 고종이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자손들을 불러놓고 “내가 죽거든 빈소는 차려 곡은 하되, 제사상 위에 음식은 차려놓지 말라. 일제 치하에서 자란 곡식은 일절 먹을 수 없으니, 국권이 회복되는 날 올리도록 하라”고 이르고는 단식을 시작했다. 이에 며느리가 옛 곡식으로 밥을 짓고 도라지나물을 마련하여 울면서 “이 쌀은 일제 치하 이전의 쌀이고, 이 나물은 일제의 세금을 내지 않은 나물입니다”라고 하니, 그 뜻을 갸륵하게 여겨 맛보는 척만 했다. 일제에 항거하다가 선생은 23일 만에 자정(自靖) 순국했다.

추강 김지섭 선생 근영
추강 김지섭 선생 근영

추강 김지섭 선생은 일본 황성에 폭탄을 투척한 독립지사이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조국 독립의 길을 모색했다. 1919년 3·1 독립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했다. 상하이와 베이징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등의 항일 애국 운동을 펼쳤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제는 한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무고한 우리 교포 6천6백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하던 차에 일왕이 참석하는 제국회의가 도오쿄오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폭탄 세 개를 휴대하고 1923년 12월 큐우슈우에 밀입국해서 오사카로 가던 중에 제국의회가 연기되었다는 신문 보도를 읽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바꾸어 일본 황성에 폭탄을 던지기로 하고, 그해 1월 5일 황성 정문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호위 경관이 저지하자, 폭탄 한 개를 던지고 궁성 쪽으로 몸을 피하려는 찰나 호위 경관들이 달려 나오는 바람에 나머지 폭탄은 니쥬바시 한복판에 던지고 붙잡혔다. 1925년 8월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이치가야 형무소에 옥고를 치르다가 지바 형무소로 이감되어 1927년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이듬해 순국했다. 그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기념탑을 둘린 돌판에 김지선 선생 활약상이 부조되어 있다 이동백 기자
기념탑을 둘린 돌판에, 김지섭 선생이 니쥬바시 다리에 포탄을 던지는 모습등의 활약상이 부조되어 있다 이동백 기자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재봉 선생은 대구 계성학교를 거쳐 경성 공업강습소를 졸업한 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가담하다가 일경에게 감시당하자, 이를 피해 고향을 떠났다.

근전 김재봉 선생 근영
근전 김재봉 선생 근영

1921년 6월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6개월간 복역했다. 출옥 뒤 만주지방을 유랑하던 그는 1922년 1월 베이징을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함께 극동 인민 대표대회에 참석했다. 이때 그는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전향하여, 블라디보스토크 꼬르뷰로(조선공산당 중앙총국)에 참가한 후, 꼬르뷰로 국내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5년 4월 17일 경성부 황금정의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당식을 거행하고, 서른여섯 살의 혁명가인 그가 책임비서로 뽑혔다. 그해 12월에 신만청년동맹 사건으로 일제에 검거되어 6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때 감옥에서 아들의 성적표를 보내라 하는가 하면, 편지에 틀린 글자가 많다고 꾸짖기도 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형기를 마치고 낙향하여 일제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민중 교양 운동을 펼쳤다. 1944년 3월 3일 향년 5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2005년 노무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재봉 선생의 생가 학암 고택 앞에는 ‘근전 김재봉 선생 어록비’가 서 있다. 이 빗돌에는 극동 인민 대표대회에 참석하면서 남긴 ‘朝鮮獨立을 目的ᄒᆞ고, 金在鳳’이란 명문(銘文)을 새겨놓았다.

생가 학암 고택 앞에 선 김재봉 선생 어록비 이동백 기자
생가 학암 고택 앞에 선 김재봉 선생 어록비 이동백 기자

김만수 선생은 1915년 만주로 망명하여 석주 이상룡 선생을 만나 군사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여 1922년 서로군정서의 의용군으로 활약했다. 1924년 서로군정서의 참모부원으로 하얼빈에 체류 중에 일경과 교전이 일어나 일경 10여 명을 사살하고 장렬히 순국했다. 1963년에 건국훈장 단장이 추서되었다.

이들의 독립 정신을 기려 2008년에 조성한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에다 오미광복운동기념탑을 세웠다. 이 기념탑은 오미동을 상징하는 여덟 송이의 연꽃과 다섯 줄기의 계수나무를 형상화한 탑신 위에 이 마을 독립지사들의 충혼이 누리를 영원히 비추리라는 뜻을 담은 불꽃 형상을 얹은 형태를 취한다. 탑 주변에는 돌판을 둘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김순흠, 김지섭, 김재봉, 김만수, 김낙문, 김병련, 김구현, 김보석 등 8명의 건국포상자를 포함하여 24명 독립지사의 양력과 업적을 새겨놓았다. 이 돌판 바깥에는 김지섭 선생과 김만수 선생의 활약상이 부조돼 있다.

그 기념탑 한 면에 새긴 김지섭 선생의 시가 관심을 끈다.

조선의 선비는 하늘만 쳐다보며

만사를 무심히 세월만 보냈네.

십오 년 전 오늘의 망국의 한을

살아서 못 갚으면 죽어서도 못 잊으리.

서릿발 같은 의지를 담은 것으로 봐서 아마 포탄으로 일제의 중심을 응징하러 갈 적에 쓴 시인 듯했다.

김진섭 선생의 문학비 이동백 기자
김진섭 선생의 문학비 이동백 기자

이 마을에서 하나 더 기억할 것은 한국 수필의 개척자인 ‘백설부’의 작가, 청천 김진섭 선생이 이 마을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의 문학비가 마을 입구 오래된 버드나무 아래 서 있다.

제77주년 광복절을 맞이하는 해에 오미마을이 낳은 독립지사들을 기억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것은 이 땅에 근원적으로 외세가 범접하지 못하게 방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