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73) 50년 전 배고픔을 해결하였던 통일벼 1
[꽃 피어날 추억] (73) 50년 전 배고픔을 해결하였던 통일벼 1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2.08.08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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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우리가 통일벼를 만나 첫 재배를 한 50년이 되는 해이다. 통일벼를 만나기 50년 전 참담하였던 우리들의 삶을 회상하여 본다.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해준 통일벼 수확' 현수막. 

 

지난 8월 첫째 수요일 상주시 공검면 한우마실에서 상주농진동우회를 하였다. 연세가 높고 노환으로 고생하는 회원이 많아 참석율이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대구, 김천, 상주에서 17명이 참석하였다. 변정일 회장이 인사로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와 민비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김성수 총무가 경과보고를 하였다. 전두해 전 소장이 건강 백 세에 대하여 특강을 하였다. 오래 사는 것이 사회에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신다며, 90세 때 자동차 면허증 갱신에 힘들었는데, 95세 때 갱신할 때는 더 힘들었단다. 일본의 100세 이상 노인은 85,000여 명이고, 한국은 8,000여 명이다. 류성무, 이경호 전 소장이 참석하였다. 77년 청도군 농업기술센터로 발령받고 떠날 때 소장으로 계셨던 96세의 전두해 전 소장이 점심(한우육회, 불고기) 식사 대를 부담하셔서 감사의 마음을 박수로 표현하였다,

올해는 우리가 통일벼를 만나 첫 재배를 한 50년이 되는 해이다. 통일벼를 재배하기 50년 전의 우리들의 삶이란 참담하였다. 사람들의 본능 욕구 중 제일 큰 것이 식욕이 아닐까? 배부르게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아이들이 많은 집에서 아이들이 서로 먹으려고 다투면 어머니는 자기의 밥그릇을 내어주고 돌아앉아 숭늉을 마셨다. 60년대 후반 군인들도 배가 고파 양동이를 들고 취사장에서 밥을 타오는 당번이 있지만, 서로 가려고 다투었다. 운이 좋은 날은 취사병이 삽으로 누룽지 끌어 한 조각씩 나누어주면 밥 양동이를 들고 오며 먹는 재미가 솔솔하였다.

1972년 3월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에서 동계증식한 통일벼 종자가 화물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농촌진흥청에서 시도 기술원, 시군 농업기술센터에 종자를 배정하였다. 농업기술센터 직원들은 지난 연말에 통일벼에 대하여 교육을 받았다. 벼알의 길이가 길고 아미로스함량이 적어 찰기가 적어 밥맛은 떨어지는데 수량은 일반벼의 두 배가 생산된다는 소리가 귀을 번쩍하게 하였다. 상주시농업기술센터에 배정된 통일벼 종자를 읍면의 논 면적 비율에 의거 지소에 배정을 하였다. 벼알이 긴 것을 보고 어른들은 6.25 직후에 배급받아 먹은 기름 냄새가 나던 ‘안남미’ 같다고 기피하였다.

 어렵고 힘들게 처음하였던 보온절충못자리 모습. 유병길 기자
줄모내기를 하는 모습. 유병길 기자

 

통일벼 재배가 시작되면서 우리나라 농업에 큰 변화가 왔다. 통일벼는 감온성품종으로 냉해가 우려되어 보온 못자리를 설치 모내기를 빨리해야 하였다. 관행으로 하였던 물못자리가 비닐을 씌워 만드는 보온절충못자리로 변하였다. 처음 하는 작업이라 힘들었지만, 수량이 많이 생산된다는 말에 불평 없이 잘 따라 주었다. 상주지역에서 1모작으로 일찍 모내기를 마쳤다. 가지 차기를 많이 하였는데 키는 작았다. 이삭이 패었는데 이삭목이 짧아 이삭이 벼 잎 속에 숨었다. 일반벼 벼가 누렇게 익으면 황금 들판인데, 통일벼는 기온이 낮아지면 벼 잎이 적고 현상으로 붉게 변하였다. 인근 농민들이 벼 이삭의 낟알을 세워보고 놀라기 시작하였다. 일반벼는 한 이삭에 50~60알 달렸는데 통일벼는 보통 120~150알이 달렸다. 타작하여 보고 모두 놀랐다. 절반 정도 채우던 뒤주를 가득 채우고 가마니에 담거나, 함석을 말아 마당에 간이 뒤주를 만들어 담았다. 통일벼 재배 첫해 대 성공을 이루었다. 일부지역 2모작으로 늦게 모내기를 한 곳은 출수가 늦어 익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과 김인환 농진청장, 농촌진흥공무원들의 헌신적인 지도로 73년부터 통일벼 재배 면적이 급속도로 확대하였다. 재배 면적이 늘어난 이면에는 여름 휴가, 공휴일을 반납한 농촌지도사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행정과 농협의 지원이 있었고, 식량 증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농업인이 있었다.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이 쓴 '주곡의 자급달성.'

 

70년대 중반 통일벼의 형질을 개량한 신품종 “유신”, “조생통일”, “통일찰”, “밀양21호”, “밀양22호”,“밀양23호” 등 다양한 신품종이 보급되어 1977년 전국 대부분의 논은 통일계통 품종을 확대 재배하였다. 77년 말 정부는 “녹색혁명 성취”로 “주곡의 자급 달성”을 선언하고,  홍보하였다.

이십대 후반의 모습과 50년이 지난 칠십대 후반의 모습. 유병길 기자

72년부터 77년까지 상주의 넓은 들판에서 청춘을 불사르며 오직 식량 증산만을 위하여 논두렁을 누볐던, 이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후반의 젊은 농촌지도사들이 50년이 지난 오늘 칠십 대 후반에서 구십 대 후반의 노인으로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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