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쓰시마 다쓰오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
[장서 산책] 쓰시마 다쓰오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2.07.24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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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치 시민의 용기와 양심

이 책의 부제는 반나치 시민의 용기와 양심이다. 감시와 탄압, 밀고가 일상화된 나치 독일에서 국가의 지시나 강요에 순종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굳건한 신념으로 저항운동을 펼쳤던 반나치 시민들이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반나치 시민들은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유대인 구원에서부터 나치 체제 타도까지 각자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다양하게 활동했으며, 인간으로서 진실하게 살아가기 어려웠던 비정상적인 시대에 진정한 인간의 길을 보여주었다.

목차는 ‘1장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히틀러 독재와 시민의 저항, 2장 홀로코스트와 반나치 유대인 구원 네트워크, 3장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한 저항시민들, 4장 반나치 저항시민의 죽음과 또 하나의 독일’, 5장 반나치 시민의 전후로 되어 있다. 대표적인 반나치 활동 3가지를 소개한다.

1. 백장미단 사건

뮌헨 대학 학생들의 반나치 조직인 백장미 그룹의 활동은 19426, 반나치 정치활동을 결의한 뮌헨 대학의 의학부생 한스 숄(Hans Fritz Scholl, 1918~1943, 사형)과 러시아 출생의 학우 알렉산더 슈모렐(Alexander Schmorell, 1917~1943, 사형)이 반나치를 호소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백장미 통신>을 작성하여 사람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함으로써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삐라를 만들어 시 내외에 배포했다.

같은 시기에 유치원 교사를 지망했던 한스의 여동생 조피 숄(Sophie Scholl, 1921~1943, 사형)도 이 그룹에 참여했다. 19431월 그룹은 다섯 번째 삐라 <독일 반나치 운동 전선 선언문-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배포하였다.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하고 난 뒤인 1943218, 그룹의 여섯 번째이며 마지막 삐라인 <학우 여러분!>을 대학 구내의 대형 홀에서 학생들의 수업 종료에 맞춰 뿌리던 조피 숄이 나치당원이었던 경비에게 발각되었다. 홀은 즉각 폐쇄되고 조피는 체포되었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22, 인민법정의 악질 판사인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는 사건의 사실관계를 따지지 않고 숄 남매와 프롭스트(Christoph Probst, 1919~1943, 사형)에게 국가반역예비음모 혐의로 참수형을 언도하였고, 7월에는 다른 세 명의 멤버에게도 같은 혐의를 적용하여 처벌했다. 백장미 그룹의 운동에 동조해서 50명 가까운 남녀 멤버를 둔 지부를 만들었던 함부르크 대학을 비롯하여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슈투트가르트 대학의 소그룹도 곧바로 적발되어 사형을 포함한 처벌을 받았다.

백장미 그룹을 둘러싼 재판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나치 시대부터 전후 초기에 걸쳐 모든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의 활동은 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단 한 장이라도 배포하면 형무소나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야 했을 뿐 아니라 잔혹하게 처형될 각오도 해야 하는 행동이었다.

2. 고독한 암살자 게오르크 엘저

1939118일 저녁, 매년 상례적으로 열리는 나치당 뮌헨 폭동기념행사에 총통 히틀러(Adolf Hitler)의 연설이 예정되어 있었다. 장소는 뮌헨시의 대형 맥주홀인 뷔르거브레우켈러였다. 이날 행사장에는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와 힘러(Heinrich Himmler), R. 헤스, M. 보어만 등 당의 주요 간부 24명이 가장 앞 열에 자리 잡았고, 2천 명에 이르는 열성적인 나치당원들도 참석했다. 시종 새로운 적 영국을 비난·공격하는 내용으로 열변을 토한 히틀러는 예정보다 30분 정도 연설을 일찍 끝내고 97분 일행과 함께 뮌헨 중앙역으로 향했다.

히틀러가 기차 속에 있던 920, 아무도 없는 연단에서 폭탄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천장이 무너지고 연단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히틀러가 한참 연설을 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청중이 돌아간 뒤여서 희생자는 사망 8, 부상자 63명이었다. 표적이었던 히틀러와 당 간부들은 13분 차이로 폭탄 세례를 피할 수 있었다.

폭파범 게오르크 엘저(Johann Georg Elser, 1903~1945, 사형)는 목수 출신의 실업자였다. 그는 스위스 국경 콘스탄츠 검문소에서 불법으로 월경하려다 체포되었다. 엘저는 베를린의 게슈타포 본부에서 이루어진 심문에서 상세한 범행계획과 함께 시한폭탄 설치 등을 재현함으로써 그날 사건이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단독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3. 720일 사건

반나치 저항운동 중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인 ‘720일 사건이다. 무려 7천 명이 체포되고, 200여 명이 처형되었다. 사건의 중심인물은 전시 중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왼쪽 눈과 오른손, 왼쪽 손가락 두 개를 잃는 중상을 당한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 1907~1944, 사형) 대령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194467일 이후 히틀러를 다섯 차례 만났다. 67일 사령관 프롬(Friedrich Fromm, 1888~1945, 사형) 대장과 동행해서 남독일 오버잘츠부르크에 있는 히틀러의 산장(베르크호프)에서 처음으로 히틀러와 면회했다. 76~7일에는 발키리 작전 설명을 위해서 만났고, 그리고 다음날에는 슈티프(Hellmuth Stieff, 1901~1944, 사형) 소장 주재로 제복설명회 때 또 만났다. 그는 7일에 폭살을 계획했지만, 슈티프의 반대로 미수에 그쳤다. 715일에는 총통본영의 하나인 프로이센 산 속의 볼프샨체에서 히틀러를 다시 만났다. 하지만 폭살계획은 힘러를 비롯한 고위간부의 부재를 이유로 베크(Ludwig Beck)와 올브리히트(Friedrich Olbricht) 등이 중지를 지시해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리고 드디어 720일 아침 7시를 조금 넘긴 시각,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부관 헤프텐(Werner von Haeften, 1908~1944, 사형) 중위와 함께 베를린으로 날아갔고, 1015분 랑스도르프 비행장 착륙 후 차로 볼프샨체로 향했다. 1240분이 지나 42분이 되었을 때 마침내 시한폭탄이 폭발했다. 하지만 이 목숨을 건 행동은 히틀러가 가벼운 상처를 입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히틀러의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모의의 거점이었던 베를린 벤들러 블록의 국방군통합사령부 앞 정원에서 721일 낮 1230, 슈타우펜베르크는 다른 주모자와 함께 사살되었다. 그에게 발포 순간 헤프텐이 뛰어들어 둘은 거의 동시에 운명했다. 그의 마지막 외침이 건물 속으로 울려퍼졌다.

영광스런 독일이여 영원하라!”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일관된 애국적 언동은 처형으로 완결됨으로써 지금까지 여러 차례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할리우드에서 2008년에 나온 <발키리>에서 이 암살 미수사건의 전모를 새롭게 조명하였다. 이 사건은 반나치 저항운동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이 책을 읽고,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야 하는 이웃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 히틀러의 범죄 행위를 목숨 걸고 고발한 대학생들, 전쟁과 홀로코스트를 막기 위해 히틀러를 제거하려 했던 노동자와 용기 있는 군인들, 나치 독일 이후의 새로운 독일을 구상했던 지식인들, 저항운동에 나섰다가 처형당한 이들의 유족들, 그리고 저항운동을 폄하하는 나치 추종자들의 준동에 대한 전후 독일 사회의 대응 등을 역사적 사실의 바탕 위에서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역사는 천천히 흘러가고 때로는 거꾸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나치 독일의 범죄행위를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가 고개를 쳐들고, 그런 목소리에 편승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세력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릴 수는 없다. 고통과 고난을 기꺼이 견뎌내며 피로 써내려간 역사는 그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적어도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라면 어찌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잊을 수 있겠는가. 어둠이 잠시 빛을 가릴 수는 있어도 결코 이기지는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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