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끌 빚투 구제유감
영끌 빚투 구제유감
  • 석종출 기자
  • 승인 2022.07.19 14: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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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어려운 시기를 견디어온 장년의 구제는 없는가

장자가 말했다. 세상에서 떠드는 최고의 지자는 큰 도둑놈을 위해 명분을 쌓아주는 자이며 최고의 성자는 큰 도둑을 위해 명분을 지켜주는 자라고. 윤석열 대통령은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사회적 비용을 막기 위한 선제 조치로 “빚 탕감”을 선언했다. 빚 탕감의 명분은 늘어날 사회적 비용을 미리 막아보자는 것이다.

영끌(영혼까지 끌어 모아 대출받는다는 뜻)과 빚투(빚내서 투자)는 주로 청년층에서 자신들이 과도하게 욕심을 부린 결과로 빚어진 산물이다. 이들에 대한 빚 탕감의 이유가 빚을 그대로 방치해서 커지는 사회적 비용을 선제적으로 막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명분은 분명하고 옳다. 앞으로 다가올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선제적으로 방어한다는 뜻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원리 중 하나는 빈부 발생의 책임을 각 개인이 부담하는 것이다. 영끌이라는 신조어는 젊은 청년들이 대출 빚을 얻어서 내 집을 마련하려고 몰려들 때 생긴 일이다. 내 집을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결국 그들의 판단이 현실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론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들이 빚을 얻어서 투자하고 부동산을 매입한 결과 막대한 부가 형성되었다면 과연 나라에서 이익의 일부라도 환수할 자신은 있는가. 그렇게 할 법적 근거는 있는가?

공정에도 맞지 않은 정책이고 정의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대통령 주재로 열린 비상 경제 민생회의에서 논의된 청년층의 채무탕감 방안이 과연 공정하고 정의로운 정책 결정인지 차분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금리 시대에 빅스텝이라는 0.5%의 기준금리 인상의 여파를 미리 대비 한다면서 30조 원 규모의 기금을 마련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결국은 국민의 세금이다. 청년들만이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것도 아니고 청년층만이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성세대들로부터 보호받고 수혜를 누리고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1970년대의 오일쇼크 때는 시중 은행의 정상적인 대출금리가 18% 정도 할 때도 있었다. 말 그대로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이자 감당해온 세월도 있었다. 그 후 1997년 1998년에 휘몰아친 아시아 외환위기 때는 은행들이 도산하고 대기업들도 버티어내지 못하고 쓰러지는 경험도 했었고, 2007년 2008년도 글로벌 금융 위기 때도 우리는 견디고 성장을 해왔었다. 근자에 전대미문의 코로나 펜데믹 영향으로 세계 경제가 침체하였다고는 하나 대한민국은 플러스 성장을 유지해 왔으며 다른 선진국들이 부러워하는 자랑스러운 모습을 우리 눈으로 보고 있다.

영혼까지 끌어다 투자하고 빚내 투자한 청년들에 대한 공정과 형평과 정의는 별나라의 그것인가? 산전수전 다 경험하고 살아남았으나 위기 때 마다 짊어진 빚더미에 짓눌려 사는 수많은 장년이 지금의 청년 세대들과 같은 대접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허황된 욕심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