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한-베트남 외교 관계의 초석을 다진, 조원일 전 주 베트남 대사
강력한 한-베트남 외교 관계의 초석을 다진, 조원일 전 주 베트남 대사
  • 배소일 기자
  • 승인 2022.07.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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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일 전 대사는 재임중 (97.3월-2000.3월) 정치, 경제, 문화교류 등 다방면에서 한.베트남 양국관계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베트남 정부가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훈장인 우의훈장(Order of Friendship)을 받은 향토 출신 외교관이다

 

조원일 전베트남 대사

제가 뉴질랜드, 이집트, 영국 근무를 거치고 나서 1980년대 유엔대표부에서 정무참시관으로 근무할 때 유엔개발기구(UNDP)의 이사직도 맡았습니다.

​<무엇이 정무(정치업무)인가>

​선진국은 중요한 업무는 모두 정무로 분류합니다. 저는 경제개발은 전형적 경제업무라고 생각했는데 박학다식하신 김경원 대사께서 정무라고 분류해 제가 UNDP 이사직을 맡도록 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UNDP 이사국은 제일 인기가 좋아서 유엔 회원국들이 합의하기가 어려워 비회원국이던 우리가 경선을 통해 이사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요 국가들은 이사국 지위를 계속 유지했으나 처음 이사국이 된 우리에게는 그 업무가 생소했습니다. 1985년 이사회에서는 다수 개도국에 대한 지원계획(5개년)을 심사했는데 그중에는 국민의 60%가 굶주리는 베트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베트남의 개발 계획을 적극 지지해서 승인되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당초에 부정적 의사를 밝힌 미국 대표는 제가 재삼 지지의사를 밝히자 끝까지 반대하지 않고 묵인해 줬습니다. 동맹국 한국의  입장을 존중해 준 것입니다.

​그 때 옵서버로 관람하던 베트남 대표는 기대하지 못한 5년 간의  UNDP 지원계획이 처음으로 승인되자, 저에게 다가와 큰 절을 하며 감사를 표명한 후에 공손하게 왜 베트남 경제개발을 지원해 주는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한국이 아시아를 대표해 선출되었으므로 한국 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빈곤 해소를 보살필 인도적 책임이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1992년 한.베 양국이 수교한 후 국제경제국장 자격으로 초대 베트남대사 응웬 푸빙에게 제가 최고 수준의 개발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호의적 조치가 몇 년후에 저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 했습니다. 제가 베트남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1997년에는 크고 작은 우리 기업 수백 개가 베트남에서 생산 활동에 착수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여성근로자들이 수천 명이 근무하는 봉제공장이 있었습니다.

​세계 최빈국으로 국민 대다수가 굶주리던 시절에 월급 3만 원 정도를 받으며  축구장 만큼이나  큰 공장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들은 정시에 출근해 10인 1조로 근무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그룹 전체의 일이 중단되므로 화장실에도 정해진 시각에만 가야했습니다. 시계가 없는 집에서 눈이 떠지면 일어나고, 허기 지면 낮잠을 자는 농촌 생활에 길들여져 시간 개념이나 강도가 높은 공동작업에 약한 점이 외국어를 모르는 한국인 기능공들과의 심각한 갈등 요인이 되었고, 노동일보는 우리 업체의 노사갈등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1997년 3월에 부임한 이래 당서기장, 국가주석, 국회의장, 국방장관등 최고위 지도자 10여명을 예방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우리 기업의 활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노골인 반감을 표시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언론의 편파적 보도>

​저는 노동일보의 편파적 보도에 따른 지도부의 부정적 인식에 대해서 정면으로 맞서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노동일보를 발행하는 노총회장에게는 "편파적 보도를 계속하면 노총과의 협조를 단절하고 언제든지 베트남을 떠날 각오라고 경고하고, 교육부장관에게는 건설 현장에서의 좀도둑질을 근절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한국 측에 뒤집어 씌우는 행태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습니다. 며칠 후부터 노동부차관과 함께 우리 봉제공장이 밀집한 남부지역에 찾아가서 3~4일씩 수십개 공장 대표들과 노사문제 심포지엄을 개최했습니다.

​베트남 노동부 차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는 "베트남에  설립한 기업은 모두 베트남 국적 기업이니 베트남 법령과 관습을 존중하고, 여성 근로자를 욕설로 꾸짖는 폐습은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계몽 활동을 벌였습니다. 베트남 국민은 오랜 유교 관습에 따라 관혼상제를 중시하므로 이웃 주민과의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도록 촉구했습니다.

​베트남 언론은 "노사문제 개선을 위한 한국대사의 획기적 정책" 이라고 대서특필했고, 노동부차관은 "한국 대사가 베트남 인민의 동지(同志)"라고 추켜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베트남 최고 지도부도 저의 신속한 조치에 화답해 "베트남 인민은 절대로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고 억지 주장을 하던 교육부장관은 해임되었습니다. 또 노총회장이 자발적으로 대사 주최 심포지엄에 동참하게 되자, 노동일보의 부정적 보도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탈북자 보호>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주기를 꺼리던 베트남 공안(公安)은 처음으로 이애란 박사와 어린 아들을 서울로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한인회보 발행>  

​당시에 민간단체대사관에서 발행하나 그 간행물을 베트남이 인정하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저는 대사관에서 한인 소식지를 발행해 베트남 문화를 한국근로자에게 소개하겠다고 제의해서 베트남 외교부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이 소식지는 1997년부터 격주로 발행되어 한인 주재원들이 애독했고 일부 내용은 베트남 인민일보에 소개되고, 외국인 커뮤니티 간행물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한인 소식지가 창간되어 자리를 잡는 데는 아시아 역사를 전공한 이철희 외무관의 공로가 매우 컸습니다.

​<한국 드라마 방영>

​1997년 11월 부터는 우리 대사관이 제공하는 연속극을 베트남 TV가 매일 방영하기 시작했고, 20여년 동안 어마어마한 시청률 (60~80%)을 기록했습니다.

​<언청이 수술>

​1997년 우리 성형 외과의사(5명)이 베트남 언청이 어린이 수술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언청이가 많았으나 수술할 의사와 시설이 부족한 베트남이 우리 의술이 세계적이라고 인정해 이 사업은 지금까지 25년간 계속되고 있고, 라오스, 미얀마에까지 사업이 확장되었습니다.

​<호치민시 한국학교 설립>

​1990년말 호치민시 일대에는 약 1만명의 한국인이  체류하고 있었는데 소수 대기업 주재원을  제외한 다수 가정은 자녀 교육비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중소업체의  주재원은 국제학교 연간 수업료 8000불을 부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헌신적인 주재원들이 나서서 연간 4000불 정도 학비를 낼 수 있는 학생 180명을 확보하면 한국학교를 설립할 수 있겠다고 저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그 학교는 호치민 총영사관 부설학교이므로 베트남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IMF 금융위기 중에 이룬 작은 기적이었습니다. 저소득층 자녀에게는 수업료를 면제해 주고, 학생 수는 수천 명으로 늘어나서 제일 큰 해외 한국학교로 성장했습니다.

​개인 명의로 은행에서 수십 만 불을 융자받아 학교 설립 시드머니로 사용한 코오롱상사 신상호 지사장등 동포사회 지도자들의 2세 사랑과 헌신적 노력은 큰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또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독학을 하던  저소득층 자녀들이 장학생이 되어 행복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사람은 모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외국 기업의 반응>

​1990년대 제일  먼저 베트남에 진출한 다수 우리 기업의 활동을 주시하며 베트남의 투자환경을 살피던 미국, 일본, 싱가폴, 유럽연합등은 한국의 대국민 외교(Public Diplomacy) 성과를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고,  베트남 행정부내 소수 친한 인사들도 우리 기업들의 활동을 호의적 으로 재평가 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성과는 1985년 유엔개발기구에서 굶주리던 베트남 국민을 우리가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