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의 말
한마디의 말
  • 석종출 기자
  • 승인 2022.07.0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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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와 희망과 사랑이 담긴 말이 아쉽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만인이 아는 의사다. 독일인이며 철학자이고 음악가로서 환경이 열악한 중앙아프리카에서 병원을 지어 평생을 헌신하고 봉사한 인물이다.

그가 평생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힘을 쏟게 하는 삶으로 변화시킨 것은 가난한 친구의 말 한마디였다. 박사가 어릴 적 어느 날 동네 아이들과 작은 다툼에서 싸움이 붙었다. 상대 아이를 넘어뜨리고 올라타서 주먹을 휘두르려는 순간 밑에 깔린 아이가 이렇게 절규했다. “내가 너처럼 고깃국을 먹을 수 있었다면 절대로 지지 않았을 거야” 가난 속에 살고 있던 동네 친구의 그 말 한마디가 어린 슈바이처의 영혼을 울렸다.

마음을 흔드는 한마디의 말은 한 사람의 생각과 일생을 바꾸어주는 계기기 되기도 한다. “말은 한 입에서 나와 천 개의 귀로 들어간다.”라는 속담이 있다. 화자가 어떤 말을 어떤 모습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수많은 사람에게 기억이 되기도 하고 쉽게 잊히기도 한다. 어떤 때는 자기의 말이 부메랑이 되어 한순간에 몰락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도 있다. 스티브 콘은 “한 줄의 힘”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키거나 오랫동안 기억나게 하는 “한마디의 말”을 파워라인이라고 했다. 말 한마디의 힘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강조한다.

링컨 대통령은 재선 선거에서 유명한 연설문 한 구절로 당선된다. “개울물을 건너갈 때는 말을 갈아타지 않는다.”는 한 구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장에 나간 장수는 바꾸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인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국가의 지도자를 바꿀 때가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전달한 메시지였다. 링컨의 유명한 펜실베니아주 게티즈버그 국립묘지에서의 연설문을 기억한다. “국민의, 국민에, 국민을 위한” 한 줄의 말이다. 당시 링컨보다 앞서 두 시간 동안 연설했던 에드워드 에버렛은 링컨의 2분 연설 중 이 한마디에 무너졌다는 유명한 일화는 말의 위력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텍스트다.

아주 옛날 가난한 선비 집에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배가 고파 자주 울었다. 부모는 배불리 먹이지 못한 설움에 북받쳐서 아이에게 못 할 말을 해댄다. 못난 놈 거지 같은 놈 미련한 놈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부어 울음을 멈추게 했다. 마침 그러한 광경을 지나가던 노인이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불현듯 노인은 아이에게 넙죽 절을 했다. 장차 대감님이 되실 분입니다. 울음을 그치시지요. 영문을 모르는 아이의 부모는 노인의 행동에 놀라 물었다. 노인은 부모에게 이 아이는 장차 큰 인물이 될 터인데 앞으로는 대감을 모시듯 깍듯한 말투로 아이를 훈육하도록 하시오. 하고는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그날 이후 부모는 아이를 사랑의 말로 키우고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로 응원해 주고 귀하게 대했다. 아이는 물론 대감이 되었다는 일화다. 파워라인은 이런 긍정의 말, 사랑의 말, 배려의 말이다.

유고슬라비아의 작은 마을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집례하는 신부 옆에서 시중을 들던 소년이 실수로 성찬례에 사용할 포도주잔을 엎질러 버렸다. 잔은 박살이 나고 온 바닥에 파편이 튀었다. 신부는 크게 화를 내어 소년에게 소리를 질렀다. “다시는 제단 앞에 나타나지 마라” 질책과 추궁이 아이를 주눅들게 하였고 소년은 마음속에는 반항의 씨앗을 품었다. 이 소년이 자라서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 되었으나 독재자로 군림했다. 그가 유고의 독재자 조셉 브론즈 티토다.

비슷한 일이 다른 성당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 성당의 신부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오히려 소년을 감싸주었다. “괜찮아 나도 어렸을 때는 너처럼 자주 실수했단다. 힘내라” 다독여주는 사랑의 말로 감싸주었다. 실수하고도 따뜻한 위로를 받는 소년은 자라서 천주교의 대주교가 되었다. 풀턴 쉰 주교다. 흔하디 흔한 말이지만 좋은 말을 실천하기가 개미가 산을 옮기는 것만큼 어렵다. 부주의한 말이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은 삶을 파괴한다. 쓴 말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은 관계를 악화시킨다. 인자한 말이 삶을 여유 있게 하고 유쾌한 말은 긴장을 풀어주고 칭찬은 용기를 실어준다. 어떤 말은 비수가 되어 평생 가슴을 찌르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어떤 말은 인생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해야 할 말이라면 긍정과 사랑으로 말하자.

한 소년이 집 근처 산길을 산책하고 있었다. 언덕길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소년은 돌부리를 캐내기 시작했으나 점점 더 돌부리는 크게 나타났다. 소년의 발끝에 걸린 돌부리는 큰 바위의 일부분이었다. 반은 분한 마음에 반은 남을 위해서라는 의로운 마음에 온종일 흙을 팠다. 결국에는 혼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는 포기했다. 하루 종일 파놓았던 흙으로 바위를 다시 덮기 시작했다. 다시 덮었을 때는 아까의 돌부리도 덥히고 말았다. 대부분 내게 상처를 주는 것은 어떤 행동보다는 말이 상처가 되는 경우가 많다. 소년을 넘어지게 했던 인생의 돌부리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내 것이건 남의 것이건 파헤치지 말고 덮어주는 따뜻한 말이라면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다. 용기와 희망을 주어 그의 인생을 바꾸게 할 수도 있다.

젊은 여성이 퇴근 시간에 자리에 앉아가게 되었다. 다음 정거장에서 중년의 여인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면서 옆자리를 비틀고 틀어 앉았다. 막무가내로 자리를 넓히는 것은 물론이요, 짐 가방을 젊은 여성의 무릎에까지 얹어 놓기도 하였다. 이런 무례한 상황을 보고 있던 맞은편 사람이 여인에게 말했다. 왜 항의하지 않느냐고. 젊은 여성은 엷은 미소와 함께 사소한 일로 화를 내고 말싸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라고 답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시간은 많습니다. 나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린답니다.” 서로 상대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덮어주고 이해하고 용서한다면 탈이 생길리가 없다.

우리 시대의 스승이고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이영춘 님은 일제의 수탈로 고통받는 한국 소작인의 치료에 일생을 바쳤다. 부모의 말 한마디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기는 생을 살게 하였다 “너는 장차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 질병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구원케 하라.” 미국인이면서 한국에 귀화한 또 다른 슈바이처 설대위(David John Seel)도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질병과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위해 의술과 봉사를 몸소 실천하였고 언제나 “믿음과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인물이다.

대통령부터 쏱아내는 말, 말, 말들이 국민들을 피로하게 한다. 용기와 희망과 사랑이 담긴 참된 말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