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5)까짓 거 죽으면 죽고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5)까짓 거 죽으면 죽고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2.06.23 17: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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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둥 살 둥 일하고 나니 6.25전쟁, 그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복달불나는 6월

5월 ‘가정의 달’,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었다. 현충일과 6.25가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리본을 갈아달았다. 등교시간 교문에서는 복장검사를 하고 적발된 학생에게는 벌 청소를 시켰다. 때를 따라 ‘독서주간’, ‘쥐를 잡자’, ‘불조심’ 등의 리본을 달았다. 학생들의 왼쪽 가슴은 정부 벽보판이었다.

농부로서 6월은 ‘눈코 뜰 새 없는 달’이었다. 찌는 듯 한 더위에 보리 추수 하나만 해도 죽을 맛인데 그 보리 베 내고 모내기까지 마쳐야 하니 죽지 못해 사는 셈이었다. 기한은 하늘이 정했다. 한 달이 채 안 됐다. 그 시기를 넘기면 보리이삭은 고꾸라지고 벼는 출발부터가 늦어져 곡수(穀數)를 감(減)했다. 실제로 모내기 언제 했느냐에 따라 논의 색깔이 달랐다. “같은 날짜에 해도 오전 오후가 다르다”고 했다. “오뉴월 하루 볕이 무섭다”는 말은 거기서 나왔다. 곡수 감할 일은 너무 많았다. 가뭄, 수해, 태풍, 냉해, 기온에 따른 병충해가 따른 천재지변이라면 제초작업, 비료주기, 농약치기, 피사리, 물대기, 물 빼기, 새 쫓기는 농부의 몫이었다. 모든 일에 때가 있듯이 농사도 마찬가지였다.

보리밭. 정재용 기자
보리밭. 정재용 기자

6월 중순은 집집마다 장구 치고 북 치고 복닥불이 났다. 보리 베기나 모내기 둘 다 허리를 굽혀서 하는 일이었다. 허리가 끊어질 듯 했다. 그러나 참는 것 외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허리가 끊어져도 모내기 하고 끊어지고 병이 나도 품앗이 마치고 나야 했다. 그렇게 서서히 병들고 늙어 갔다.

모내기는 협동작업이어서 제몫을 못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옆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한 포기라도 덜 꽂으면 못줄은 넘어가지 않고 일찍 꽂은 사람들은 서서 뉘가 늦고, 뉘가 제몫을 못하는지 지켜봤다. 덕분에 허리를 펼 수 있어 좋기는 하지만 일은 그만큼 더뎌 그는 ‘품앗이 기피대상’이 됐다.

모를 빨리 꽂으려면 모를 쥔 왼손과 모를 꽂는 오른손 모두 무논 가까이 있어야 했다. 왼손에 모를 한 움큼 쥐고 오른손이 모를 꽂는 동안 왼손의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은 살금살금 모 서너 포기를 세서 내밀었다. 그러면 오른손이 제비가 먹이를 낚아채듯 그 세 포기를 들고 무논에 꽂았다. 허리가 아프면 굼뜨기 마련이었다. 왼팔의 팔꿈치를 왼쪽 무릎에 얹어 버텼다. 오른손과의 거리가 멀다보니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힘들고 맞추자니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보리 베기로 반 골병이 든 데다 잇달아 모내기로 접어드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보리는 어쩔 수 없을 때는 엉덩이를 바닥에 댈 수나 있지만 모내기는 무논이니 구부리는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도 아니고 직각이다 못해 코를 박듯 엎드려 모를 낼 때는 게걸음, 내고나면 가재처럼 뒷걸음질을 했다.

“깜빡 죽었다가 한 달 지나고 깨나면 좋겠다” “다 죽었뿌마 모숭기(모내기)는 누가 하고” “죽는 놈이 이것저것 따지고 죽나 뭐” “엄마야!” 죽고 싶다고 푸념하던 아낙이 고함을 치며 내달아 논둑에 올라섰다. “뭐냐?” “뭐꼬?” 모두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째빈쟁이, 째빈쟁이” 아낙이 벌벌 떨며 나왔던 곳을 가리켰다. 왕잠자리 애벌레를 ‘째빈쟁이’라고 불렀다.

모내기를 하다보면 가끔 종아리가 따끔했다. 깜짝 놀라 다리를 들어보면 째빈쟁이가 매달려 덜렁거렸다. 그놈은 생긴 것부터가 징그러웠다. 크기나 굵기는 가운데손가락만 했다. 왕방울만한 눈알, 사마귀 배를 닮은 물컹물컹하고 길쭉한 몸통에는 삐쭉삐쭉한 털이 나 있었다.

김동인(金東仁, 1900~1951)의 소설 ‘붉은 산’에 ‘익호’라는 사내가 나온다. 소설은 익호의 생김새를 이렇게 표현했다. “얼굴이 쥐와 같고, 날카로운 이빨이 있으며, 눈에는 교활함과 독한 기운이 늘 나타나 있으며, 발록한 코에는 코털이 밖으로까지 보이도록 길게 났고, 몸집은 작으나 민첩하게 생겼고, 나이는 스물다섯에서 사십까지 임의로 볼 수 있으며, 그 몸이나 얼굴 생김이, 어디로 보든 남에게 미움을 사고 근접하지 못할 놈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그의 별명은 ‘삵’(살쾡이)이었다.

무논의 무법자 째빈쟁이는 익호 같은 존재였다. 그놈은 날카로운 이빨로 송사리나 올챙이를 잡아먹었는데, 종아리가 자기 영역을 침범하자 물고 늘어진 것이었다. 손으로 꼬집는 것을 ‘째빈다’라고 했다. 누군가 아낙을 보며 “죽고 싶다매?”라고 했다. 한 바탕 웃음이 일었다. 거머리도 피를 빨아먹었다.

안강들 멀리 도덕산과 어래산(오른쪽)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안강들 멀리 도덕산과 어래산(오른쪽)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오후 새참 때면 재빨리 그릇을 비우고 바로 논둑에 드러누웠다. “아이고, 죽겠네” “죽지 못해 산다” “죽을 판 살 판이다” “일 다 하고 죽으려면 죽을 날 없다카디(하더니) 이러다 죽겠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까짓 거 죽기까지밖에 더 하겠나” “이판사판이다” 모두가 ‘죽는 타령’이었다.

농부의 꿈은 자식에게 농사를 물려주지 않는 것이었다. 읍사무소 직원은 소망의 실상이었다. 농부는 밖은 폭염인데 선풍기 돌아가는 사무실에 앉아 반팔 모시남방 차림으로 펜대를 굴리는 서기(書記)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아이들이 모내기 논을 지나가며 노래를 불렀다.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직장마다 피가 끓어 드높은 사기/ 총을 들고 건설하며 보람에 산다/ 우리는 대한의 향토예비군// 나오라 붉은 무리 침략자들아/ 예비군 가는 길에 승리뿐이다”[전우 작사 이희목 작곡, ‘예비군의 노래’ 1절] 아이들은 ‘예비군’(豫備軍)을 ‘아버지군’으로 바꿔 불렀다. 허리를 일찍 편 모잽이(모잡이)가 말했다. “애비는 모숭기로 정신없어 못 간데이~” 왁자 웃었다. 향토예비군은 1968년 4월 1일에 창설됐다. 결석생이 늘어날 무렵 학교는 가정실습(家庭實習)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