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박홍규 '우리는 꽃이 아니라 불꽃이었다'
[장서 산책] 박홍규 '우리는 꽃이 아니라 불꽃이었다'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2.06.19 17:2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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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부터 나오미 클라인까지,
세상과 맞서 싸운 이단아들

저자 박홍규는 1952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법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시립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 전공뿐만 아니라 정보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 인문·예술학의 부활을 꿈꾸며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책에는 2019년부터 2022년 1월 22일까지 <한겨레>에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라는 이름으로 연재한 57편의 글이 실려 있다. 저자는 이단아에 대해서 ‘시대와 세상 또는 나라의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 대세에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간 사람들’이라고 정의하고, 이단아를 아웃사이더, 소수자, 반항인, 저항인, 예외자 등으로도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목차는 ‘제1부 사상과 행동의 이단아들, 제2부 문학과 예술의 이단아들’로 되어 있고, 1부에 루이즈 미셸 외 29명, 2부에 프란시스코 고야 외 26명의 이단아들을 싣고 있다. 사상과 행동의 이단아인 현계옥과 호세 무히카, 문학과 예술의 이단아인 헤르만 헤세과 뱅크시를 소개한다.

1. 현계옥: 신청년의 애인이 아닌 독립운동 동지로 살다

현계옥(玄桂玉, 1896~?)은 1896년 경남 밀양에서 관기의 딸로 태어났으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 당시 천민이었던 악공 아버지는 딸을 어머니처럼 관기로 키우려고 가무를 가르쳤다. 그러나 1908년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현계옥은 달성군으로 이주해 노래와 춤을 파는 동기(童妓)가 된다. 기생집에서 일하던 중 그는 노동야학 보조교사인 현정건(소설가 현진건의 셋째 형)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두 사람의 사랑을 안 현정건의 집안에서는 현정건에게 양반집 딸(윤덕경)과의 결혼을 강요했다. 하지만 현정건은 1910년 결혼 3일 만에 상하이로 가고 현계옥도 서울로 가서, 두 사람은 편지로 열렬한 사랑을 이어간다.

1919년 2월에 현정건이 밀입국하자, 현계옥은 그에게 동지로 대해줄 것을 요구해 현계옥의 집은 독립운동 아지트로 변했다. 현계옥은 그해 3월 만주로 가서 현정건과 살림을 합쳤다가 이듬해 함께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에서 가야금 연주로 생활하면서 연극배우로 번 돈을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또 현계옥은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해 김원봉에게 폭탄 투척법과 권총 사격법을 배운다. 최초의 여성 단원이었던 그는 헝가리인 폭탄 전문가 마자르를 도와 폭탄 제조와 운반 작업을 수행하기도 했으나, 1923년쯤 의열단 일은 끝났다. 당시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이 주도한 조직인 청년동맹회가 의열단의 암살 활동을 테러리즘으로 매도해 청년동맹회의 중요 멤버인 현정건과 대립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을 떠난 현계옥은 청년동맹회에 참여해 현정건과 함께 1926년에 잡지 <여자해방> 발간을 담당했다.

1927년 4월 장개석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파괴하고 좌파를 탄압하기 시작하자, 중국에서 조선인 좌파에 대한 일제의 탄압도 거세어졌다. 그래서 이듬해 3월 현정건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12월에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1932년 6월 출옥하기까지 평양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현계옥은 현정건이 출옥하기 1년 전인 1931년 7월 상하이를 떠나 모스크바로 가서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증빙자료는 없다. 현계옥이 현정건의 출옥을 기다리지 않고 모스크바로 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출옥 후 현정건이 본처(윤덕경)에게 돌아간 것은 사실이다.

1932년에 현정건이 출옥하고 6개월 만에 병으로 죽자 윤덕경도 한 달 반 뒤에 음독자살한다. 그리고 현계옥은 몽골 광야에서 야생마처럼 사라진다. 1924년에 세워진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몽골인민공화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까지 그곳에서 관련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안타깝기 짝이 없다.(63~67쪽)

2. 호세 무히카: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다

호세 무히카(José Mujica, 1935~ )는 1935년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국 우루과이는 1930년에 제1회 월드컵 대회를 개최했을 정도로 선진국이었으나 1970년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가 집권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무히카는 고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않고 독재정권에 맞서 도시 게릴라 활동에 뛰어들어 ‘로빈 후드’로 불렸다.

그는 37세였던 1972년에 투옥되어 50세가 된 1985년 민정 이양 후 석방되기까지 무려 13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감옥에서 그는 진정한 민주주의자로 거듭났다. 뒤에 그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추천된 이유는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게릴라에서 민주주의자로 부활했기 때문이다.

무히카는 진보세력을 단결시킨 민중 참여 운동을 거쳐 1994년에는 하원의원, 1999년에는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2005년에 출범한 타바레 바스케스의 민주정권에서 농축수산부 장관을 지낸 뒤 2010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국회의원이나 장관은 물론 대통령이었을 때도 농사일을 계속했으며 20평의 낡고 누추한 오두막에서 살았다. 비서나 경호원은커녕 부인이나 자녀도 없이 다리 저는 개와 함께 다니며, 손수 장비를 들고 이웃집을 수리하기도 했다.

무히카는 간디 이후 자발적 가난으로 산 유일한 지도자다. 월급의 90퍼센트는 빈민주택기금으로 기부했고, 남은 액수도 국민 평균 소득 80만 원보다 많은 정도라고 하였다. 그는 유일한 재산인 낡은 차로 출퇴근하는 길에 히치하이커들을 태워주고 비리가 단 한 건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었다.

부패, 문맹, 극빈층을 줄여 레임덕은커녕 취임 때보다 퇴임 후의 지지율이 더 높았지만 대통령 선거 재출마 요구를 완강히 거절하고 농부로 돌아갔다. “나는 농부다.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그렇다. 땅에서 일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다”고 그는 자주 말했다. 그리고 “나는 인생을 간소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이런 삶이 주는 여유가 좋다”고 했다.(138~143쪽)

3. 헤르만 헤세: 그 누구도 모범으로 삼지 마라

헤르만 헤세(Herman Hesse, 1877~1962)는 1877년 독일에서 태어나 1962년에 사망했다. 그를 보통 ‘독일’ 작가라고 하지만, 46세였던 1923년부터 스위스 국적을 가지고 스위스에서 40년간 살다가 죽었으니, 헤세는 ‘스위스’ 작가다. 아니, 아무 이유 없이 ‘향수’라고 번역된 첫 소설인 <페터 카멘친트>를 출판한 1904년부터 그는 스위스에서 살았다. 게다가 4세부터 9세까지도 스위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따라서 독일에서 산 기간은 10~20대의 10여 년에 불과하다.

헤세가 12세 때 시인이 되려 하자, 부모와 교사는 그를 신부나 학자로 키우고자 수도원 학교에 강제로 넣었다. 그곳에서 도망친 그는 보호시설과 정신병원을 거쳐 다시 새로운 학교에 들어가지만 도망친다. 이어 서점이나 공장에서 훈련을 받는 것 역시 중단했다. 그래서 ‘구제불능’, ‘실패자’, ‘부모의 치욕’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 그를 학교나 교사, 심지어 부모까지도 좋아할 리 없다. 그는 학교를 다닌 8년간 고마운 교사가 단 한 사람뿐이고, 학교란 언제나 맞서 싸워야 하는 절대 권력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독재를 휘두르는 절대 권력이 요구하는 굴종에 대한 반항은 학창 시절부터 싹터서 그의 평생을 지배했다.

그는 우리 식으로 중학교 2학년 중퇴 수준까지만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 후에는 철저히 독학을 한다. 아니, 그 8년간에도 배운 게 별로 없고 독학을 했으니 평생 혼자 공부한 셈이다. 그는 대학 교육도 경멸했다. 그의 삶이나 문학의 원리는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다. 진실한 것과 고귀한 것을 찾아 스스로 읽고 생각하며 쓰는 것이다. 그게 그의 고독이다.

그것은 ‘천재’의 까닭 모를 외로움이나 알프스를 향한 향수가 아니라, 모든 권력이나 권위나 전통으로부터의 고독이다. 특히 역사나 국가, 민족이나 대중으로부터의 고독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반사회적이다. 즉, 현 사회를 부정하고 비판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헤세만큼 유토피아적 공동체나 아름다운 자연 속의 삶을 강렬하게 표현한 작가도 다시없다는 점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사회적이다.

헤세의 모든 작품은, 그리고 도시를 벗어나 평생 시골에서 살았던 헤세의 생애 자체는 자연 속의 자연아 그것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톨스토이와 윌리엄 모리스를 따랐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많은 음악가와 미술가를 사귀면서 그 자신은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는 어떤 의미에서도 그들과 무리 지어 집단을 만드는 것은 거부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에게 친구가 없다고 말했다. 그 점에서도 그는 스스로 외로운 왕따였다.

부모든, 교사든, 언론인이든, 예술가든, 지식인이든, 그 누구든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개성을 키워주는 일이라고 헤세는 말한다. 어떤 정치 슬로건이 아니라, 홀로 바르게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발적 왕따를 키우는 일’이다. 물론 그 개성은 결국 개인이 찾는 것이지 누구도 그 개성을 대신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누구도 누구의 모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헤세는 자신을, 다른 그 누구도 모범으로 살지 말라고 끝없이 경고한다.(209~214쪽)

4. 뱅크시: 길거리 미술로 변혁을 꿈꾸다

2003년 <가디언>과의 인터뷰를 보면, 뱅크시(Banksy, 1973~ )는 1973년 영국 브리스틀 부근의 시골에서 태어나 퇴학을 당하고 경범죄로 복역하기도 했으며, 14세에 그림을 시작해 1990년대에 브리스틀에서 그라피티를 그리다가 2000년쯤 런던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알려진 사실이 없다. 인터뷰 당시의 모습은 지저분한 청바지와 티셔츠에 치아가 은색이고, 목걸이를 한 남자로 묘사되었다.

뱅크시는 그라피티를 하층계급이 할 수 있는 ‘복수’ 또는 개인이 더 강하고 더 우월한 적에게서 권력과 영토와 영광을 빼앗을 수 있게 하는 게릴라전의 한 형태라고 특징짓는다. 그의 작품은 반전, 반체제, 반소비주의, 반파시즘, 반제국주의, 반권위주의, 반관료주의, 반폭력주의, 반자본주의, 반상업주의와 같이 기존 가치에 철저히 반하는 아나키즘, 니힐리즘, 실존주의, 생태주의 등 다양한 정치적·사회적 주제를 다루어왔다. 특히 제복을 입은 남성 경찰들이 동성애자처럼 키스를 하고, 왕실 근위병이 총을 벽에 세워두고 눈치를 보면서 소변을 갈기고, 무장 군인들이 주위를 살피며 평화를 나타내는 마크를 그리는 그림 등으로 권력에 대한 저항을 나타낸다.

반면 뱅크시는 평화의 마크를 목에 걸고 ‘아나키즘(anarchism)’을 뜻하는 ‘A’자를 쓴 피켓을 든 쥐를 비롯해 수많은 쥐의 형상, 폭탄이 숨겨진 아이스크림을 들거나 제 몸보다 큰 폭탄을 껴안은 소녀를 포함해 희생당하는 아이들, 돌이 아니라 꽃을 던지는 시위대, 분홍색 꽃 리본을 달고 날아가는 군용 헬리콥터, 쇼핑 카트를 밀거나 원시적 무기로 쇼핑 카트를 공격하는 원시인, 창문을 깨고 내던져지는 텔레비전을 그린다. 그는 명령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 주민을 학살하는 자들처럼 법에 복종하는 것이 거대한 범죄라고 했다. 그의 작품이 공통적으로 비판하는 인간 조건을 구성하는 요소는 탐욕, 가난, 위선, 권태, 절망, 부조리, 소외 등이다. 그 상징으로 쥐, 침팬지, 경찰, 군인, 어린이, 노인 등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2020년 6월 뱅크시는 <불타는 성조기>를 그렸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인종차별 문제를 아파트 위층의 수도관이 망가져 아래층으로 물이 새는 상황에 빗대었다. 그는 인종차별은 백인들의 문제라며 그들이 고치지 않는다면 누군가 위층으로 올라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한 병원에 몰래 두고 간 그림 <영웅>은 코로나19와 싸우는 의료진을 영웅으로 표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주요 주제는 ‘평화’다. 그가 2005년 8월에 팔레스타인을 여행하면서 서안 성벽에 그린 9점의 그라피티가 대표적이다. 팔레스타인을 거대한 감옥으로 만드는 장벽 위, 이스라엘 군인들이 총을 겨누는 상황에서 그 장벽이 뚫려 평화가 찾아오고, 그 장벽을 아이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며, 아이들이 그 장벽을 뚫고 구멍을 판다. 뱅크시는 그 너머로 천국의 상상이 펼쳐지는 가운데, 방탄조끼를 입은 비둘기의 심장에 사격 조준점이 맞추어져 있는 그림을 그렸다.

21세기에 들어 뱅크시는 장 미셸 바스키아, 키스 해링, 앤디 워홀과 비교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개성을 표출하는 무한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그들과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길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뱅크시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지만, 한국 미술계는 뱅크시보다 바스키아를 따르는 사람이 많다. 민중미술도 걸개그림의 전통 탓인지, 뱅크시처럼 재기발랄하고 부드러운 유머와 위트가 흘러넘치면서도 은근히 반체제를 도발하는 작품을 보기가 쉽지 않아 유감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일반인보다 ‘권위주의’나 ‘관료주의’나 ‘상업주의’나 ‘물신주의’ 따위에 더 찌든 미술인도 적지 않아, 뱅크시 같은 정의의 미술 폭탄이 우리에게도 제발 터져주기를 학수고대한다.(335~3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