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영시(大邱令市) 화재의연공덕비’ 재발견
‘대구영시(大邱令市) 화재의연공덕비’ 재발견
  • 정신교 기자
  • 승인 2022.06.20 10:3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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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약령시 화재의연공덕비, 경북대 이문기 명예교수 정밀 판독으로 해석
대구영시 화재의연공덕비 전면(대구약령시 소재). 정신교 기자
대구영시 화재의연공덕비 전면(대구약령시 소재). 정신교 기자

대구시 약전골목에 이십 년 이상 방치된 비석(대구 중구 남성로 21 모던다방 앞)이 경북대 이문기 명예교수의 판독과 조사 연구로 1899년 발생 대구 약령시 화재 피해 규모, 의연금 출연과 분배 등이 기록된 대구 최초의 화재의연공덕비(火災義捐功德碑)로 밝혀졌다.

발견 당시 비석(가로 41㎝, 높이 95㎝, 두께 12.5㎝)은 비수(碑首)가 멸실된 상태였으며, 비신(碑身)이 인공적으로 절단되어 일부 비문이 지워진 상태였다.

원래 비석은 대구 중구 성내동의 어느 민가에서 디딤돌로 사용되어 오다가 2003년 박순동 씨(구 인보당 한약방 회장)에 의해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20년 가까이 방치되어 오던 비석은 2022년 5월 김용익 씨(언어문화연구회 자문위원, 전 계성고 교사)의 제보로 경북대 이문기 명예교수(역사교육과)의 육안 판독과 탁본, 정밀 실측 및 3D 스캔 등 과학적인 조사 연구를 통해 비문이 완전하게 해석됐다.

비석의 첫 줄에는 ‘의연제군자 각전방보조(義捐諸君子 各廛房補助)’라고 기록돼있다. 다음 줄에는 3단으로 나뉘어 의연금을 출연한 인물과 기관 단체의 명단과 액수가 기록되어 있다. 국채보상운동 발의자 서상돈 씨부터 이선순, 서덕초, 최극창 등의 지역 유지 및 부호 14명의 이름이 들어 있다. 비문의 가장 아랫단인 4단에는 모인 의연금의 합계와 사용처가 적혀 있다.

의연금의 사용처에 ‘화재 피해 화물의 가격’과 ‘화재 피해 민가’라는 구절로 보아 의연금이 대구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의 피해자들을 구호할 목적으로 거둔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이 비석이 대구영시((大邱令市, 현 대구약령시)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의 구호를 위해 의연금을 거두고 이를 분배한 전후 사정을 기록하여 건립한 ‘화재의연 공덕비(火災義捐 功德碑)’ 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황성신문 기사(1899년 12월 5일)를 인용하여 본 화재가 1899년 12월 2일 오전 대구영시(약령시)에서 발생한 화재임을 입증했다.

이문기 명예교수는 “대한제국 말기의 국채보상운동으로 이어지는 대구 유지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입증하는 귀중한 유물이며 추가 연구를 통해 정확한 비석 명칭과 건립 경위 등이 구명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2019년 경북대 역사교육과를 정년 퇴임한 이문기 명예교수는 재임 중 고대사학회장, 역사교육학회장, 경북대 박물관장, 경북대 사범대학장 겸 교육대학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2021년부터 2년 임기의 경북도 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비석이 위치한 대구약령시 전경. 정신교 기자
비석이 위치한 대구약령시 전경. 정신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