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는 마음으로 나이를 잊는다면
시 쓰는 마음으로 나이를 잊는다면
  • 김채영 기자
  • 승인 2022.05.31 12:00
  •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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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아버지 기일(忌日)이어서 동화사에 다녀왔다. 지하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15층까지 바로 간다. 그런데 어떤 느낌의 동력을 받았는지,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남편에게 잠시 기다리라 하고 1층에서 내렸다. 마음 급한 눈이 빠르게 우편함을 살폈다. 선배님이 보내신 신작 시집 한 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다보면 이렇게 예감이란 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소싯적에는 시집을 끼고만 다녀도 멋있어 보였다. 언젠가부터 시를 쓰는 사람이 멋있어 보였다. 요즘은 시를 읽는 사람이 더 멋있게 보인다. 그만큼 시집이 흔하다는 것이고 시인되기가 수월해졌다는 점이다. 내 주변에도 시인들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SNS의 발달로 초판이 다 팔리는 경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 발품 팔고 서점에 나가서 시집을 구입하여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니 시집을 구입해 읽는 사람이 오히려 멋있게 보이는 것이다.

사실 나는 책을 많이 구입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고급 독자는 못 된다. 부끄럽게도 읽기용이 아니라 소장용이 대부분이다. 요즘은 시집이나 수필집을 공(空)으로 받는 경우도 많다. 책은 절대 공짜로 받으면 안 된다던 스승의 말씀이 한 몫 하겠지만 성격적으로 공짜를 싫어한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처럼 마음의 채무든 물질의 채무든 현세에서 못다 갚으면 후세에 가서라도 반드시 갚아야할 것 같아서 빚지지 않으려는 사고방식을 고수하는 편이다.

시간이 남아돌아 시를 쓰는 사람은 없을 게다. 천부적인 재주를 타고나서 ‘나, 지금 시 써야지’ 작정한다고 뚝딱 시가 되는 일도 아니다. 모르긴 해도 자신을 심해의 밑바닥까지 끌고 내려가서 숨쉬기조차 어려운 순간과 맞닥뜨리리라. 그런 고통을 감수하며 어렵사리 시 하나 건져 올릴지 모른다. 그거 안 해도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을 테지만 창작을 천명처럼 떠안고 산다. 작가들에게 결례가 될지 모르나 속된 표현으로 돈이 되는 분야도 아니다.

“해 저물도록 나는 어디를 헤매다 이제야 왔을까. 지난날엔 잘 몰랐지.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이 들면서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때 간절함이 찾아왔어. 그 간절함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어. 간절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있어. 운명을 이겨내는 힘이 있어. 나는 그 힘을 믿어.” 선배가 보내준 시집 『간절함은 늙지 않는다』 표4의 글을 행갈이 생략하고 산문형식으로 옮겨보았다. 

짧은 글이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형용사 ‘간절하다’는 ‘무엇을 바라는 마음이 더없이 지성스럽고 절실하다.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지닌다. 나도 한때는 가슴 울려줄 서정시를 쓰고 싶었다. 백 명이 한 번 읽는 시가 아니라 한 명이 백번 읽어줄 시인이 되고자 꿈꾸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디서 헤매고 있는가. 지성이 부족했는가. 절실함이 부족했는가. 간절히 원하기는 했던 것일까. 간절함을 열정이라 해도 무방하다면 내 간절함은 이미 늙어버린 것을.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르다는 흔한 말을 상기시킨다. 시 쓰는 마음으로 나이를 잊는다면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오늘 읽은 시집 한 권이 나이 핑계 앞세우고 게으름만 피우는 나를 반성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그러니까 선배님이 보내신 귀한 선물이 자극제의 순기능 역할을 한 것이다. 속주머니 깊숙이 넣어둔 한때의 소망과 열정을 꺼내 봐야겠다. 봄을 데리고 떠나는 5월이 덜 서운한 이유라면 과장법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