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이순자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장서 산책] 이순자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2.05.22 13:2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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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앞에서는 용기를 냈고, 이웃과 소외된 자들의 곁에 섰으며,
백지 앞에서 가장 솔직했던 작가 이순자
그가 세상에 남긴 희망하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이야기

 

저자 이순자(1953.9.29.~2021.8.30.)는 4대가 함께 사는 종갓집 맏며느리로 결혼 생활을 시작했으며, 20여 년 넘게 호스피스 등의 봉사활동을 했다. 황혼 이혼 후 평생 하고 싶던 문학을 공부하고자 문예창작과에 진학했다. 고단한 삶에도 자기 존엄을 지키며 글쓰기에 정진한 그는 <솟대문학>에 시를 발표하고, <순분할매 바람났네>로 제16회 전국 장애인문학제에서 대상을 받으며 창작의 결실을 맺었다. 62세에 취업 전선에 나선 경험을 담은 수필 <실버 취준생 분투기>는 2021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당선되었으나 얼마 뒤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자신과 가족, 이웃의 고통과 상처를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은 그의 삶은 혐오와 차별의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방향키가 되어주었다.

목차는 ‘서문 어머니의 유고집을 펴내며, 1부 결핍이 사랑이 될 때, 2부 내 인생에 가장 큰 선물, 3부 정진하리라, 죽는 날까지, 4부 보드블럭 사이에 핀 민들레꽃처럼, 나가는 글 제 꿈으로 놀러 오세요’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저자 사후 출간된 유고 산문집으로, 저자가 생전에 집필하고, 정리한 원고를 저본으로 편집되었다. 4부에 실린 <돌봄>은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한 소설이다.

고단한 세상살이에 누구의 삶이 시가 아니며, 누구의 삶이 수필이 아니며, 누구의 삶이 소설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생김이 다 다르듯 삶의 형태도 다 다르다. 각기 다른 삶을 엿보는 게 문학이 아닐까. 이제 쉰 중반에 들어서며 내 안의 이야기를 풀어보겠다고 여기 이렇게 달려 나가고 있다. 시 나와라 뚝딱. 수필 나와라, 뚝딱. 소설 나와라, 뚝딱. 뚝딱, 뚝딱. 하고 싶은 말이 가슴속에서 제멋대로 찧고 까부른다. 혼자 품기 아까운 삶의 이야기를 토해내고 싶은 열망으로 오늘도 머릿속은 바쁘다. 그것이 시로, 수필로, 소설로 녹아나기를 기대한다. 나의 문학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아온 수많은 경험은 젊음으로 살 수 없는 밑천이 되리니. 오늘은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끌어내지 못하고 끙끙거릴지라도, 어느 날 문득 진한 가래 뱉어내듯 내 안에서 곰삭은 상처가 툭 튀어나오리라. 고단한 삶의 끄트머리에서 나를 치유하는 시원한 은단 향으로 피어나리라. 비록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펄떡이는 내 삶이요, 행복이다. 그러니 나의 글은, 영원히 헤쳐나가야 할 내 인생 바다에 띄우는 마지막 돛단배가 되리라.(나의 삶 나의 문학, 87~88쪽)

죄를 많이 지어 성당에 가고 싶다는 할머니는 소정의 교육을 받고 천주교에 입문하셨다. 성호도 잘 못 긋는 할머니에게 마음으로 읽으시라고 성경책과 성가책을 선물했다. 생전 처음 책 선물을 받아본다며 하마 입이 되어 웃는 할머니는 책을 가슴에 꼭 안았다. 누가 순분할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순분할매의 일생은 살아내기 위한 처절한 노력과 자식을 지키기 위한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순분할매 바람났네, 102쪽)

장례는 2일장이었다. 밤새 눈이 내렸다. 천막 아래에서 아저씨들은 할 말이 없다며 막걸리잔을 비우셨고, 철없는 아이들은 큰 가마솥의 뜨끈한 국수를 원 없이 먹을 수 있어 신나 했다. 고향이 어딘지, 가족은 있는지 할아버지의 사정을 아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잔뜩 찌푸린 날씨에 눈까지 흩뿌려 어두컴컴했던 다음 날 아침, 거적때기에 둘둘 말린 할아버지가 지게에 실려 나갔다. 장례에 동네 사람이 다 모였지만 적막했다. 지게 위에 얹힌 나무토막 같던 할아버지 시신과 그 많은 사람들 사이의 고요. 눈은 또 왜 그렇게 내리든지……. 그날의 광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다. 생기면 먹고 없으면 굶고 산 한 생(生)이었다. 달도 쩍쩍 얼어붙는 엄동설한에 할아버지는 얼음 덩어리로 가시고, 장례에 쓰고 남은 밀가루로 동네잔치를 벌이자 동네는 비로소 떠들썩해졌다. 그 광경이 나는 지금도 너무 섧다, 할아버지를 팔아 벌인 잔치 같아서.(마지막 구걸, 109~110쪽)

남편의 퇴직금으로 지은 건물을 포기하면서까지 이혼을 택했던 이유는 오직 남편으로부터의 자유였다. 대학생 남매를 데리고 나온 나는 이미 내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어쩌면 나를 찾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평생 하고 싶던 문학 공부를 하려고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나의 늦은 공부는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글쓰기보다 호구지책이 먼저였다. 그것이 취업 분투기가 나온 배경이다. 언젠가 나는 글쓰기 수업에서 아이러니가 어렵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의 삶이 아이러니다. 예순을 넘기고 취업 전선에 뛰어든 나의 직업 분투기는 치열했다.(실버 취준생 분투기, 197~198쪽)

어머니 가시고 한 달쯤 되게 아팠어요. 언니들과 아이들이 입원을 권유했지만, 저는 견뎌내야 했어요. 어머니 건너가신 후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에 서서 갈등하던 제 마음을 잘라내야 했으니까요. 참 힘들었어요, 거기 그렇게 선 채 돌아올 줄 모르는 제 마음이……. 오늘은 제 손을 내밀어 그 선을 넘고 싶습니다, 어머니를 뵈러 갈 수만 있다면요. 유난히 보라색을 좋아하시던 우리 어머니. 저 구름 좀 보세요. 어머니 만나는 꿈을 꾼 날에는 꼭 이렇게 보랏빛 구름이 몰려와요. 구름 사이로 보라색 꽃들이 뭉게뭉게 피어나네요. 벌써 새벽 4시 36분이에요. 오늘도 보랏빛 구름 타고 제 꿈으로 놀러 오세요.(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244~245쪽)

이 책에는 도전하고, 부딪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는 저자의 ‘매일 새롭게 어려운’ 노년의 일상이 담겨 있다. 살면서 겪은 크고 작은 일들이 ‘고통’에서 “사랑의 원동력”으로 바뀌기까지의 시간, 약자를 향한 지극한 마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자의 겸손한 노력, 배우는 즐거움, 돌보는 자의 정성이 담겨 있다. “이제 시작이다. 정진하리라, 죽는 날까지.” 글쓰기를 향한 이 다짐이 안타까운 건 정갈한 그의 글을 더는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삶이 정진과 노력이었다면 이 글은 노력 끝에 맺은 결실일 것이다.(박연준 시인의 추천사, 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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