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의사기념관 다녀오다
박열의사기념관 다녀오다
  • 김채영 기자
  • 승인 2022.05.16 10:20
  •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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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김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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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1902~1974)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독립운동가다. 항일운동단체인 비밀결사대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관동 지방의 대지진 때 일본인들에 의한 대학살 사건이 터지자 박열이 그 배후자로 체포되었다. 천황을 암살하려했다는 대역죄를 뒤집어 쓴 채 22년간의 옥살이를 하다 1945년에 풀려났다. 이후 납북되었으나 반공우익노선을 걸었음이 증명되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김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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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의 고향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에 세워진 박열의사기념관을 찾아갔다. "박열이 보여준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을 널리 알리고 후손들이 그 정신을 이어갈 수 있도록 2012년에 개관하였다"라는 안내문을 읽는다. 기념관 좌측편에 깔끔하게 잘 정비된 묘소가 눈길을 끈다.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의 묘다. 6.25 때 납북되어 북에서 사망한 박열의 유해가 돌아오지 못한 까닭에 후미코 혼자 남편의 고향을 지키며 잠들어있다. 

 

김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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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영화 ‘박열’을 보고 마음이 더 끌린 것은 가네코 후미코였다. 사랑에 국경이 없다 하던가. 사랑을 하나의 과업으로 생각하고 의식적으로 시도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러나 예외도 있다. 국경을 뛰어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나라를 버리고 선택한 가네코 후미코의 사랑이야말로 일생일대의 과업이 아니었을까. 아나키스트 박열을 만나 동거서약서 한 장으로 동지이면서 동반자가 되었다. 옥중 결혼식과 혼인신고를 했던 정식 부부였으나 그녀에겐 평범한 삶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김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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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코는 1904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 문란한 생활을 일삼는 부모의 무관심과 학대 속에서 친척집을 전전하다 조선에 있는 친척집으로 오게 된다. 권위주의적인 할머니와 고모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어린 나이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는데 그때 이웃인 조선인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따뜻한 정을 느낀다. 그 무렵 3.1운동을 목격하면서 억압받고 학대당하는 식민지 조선인의 실상을 통하여 일제의 비인간성을 몸소 경험한다. 가네코 후미코의 사상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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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도 박열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존경의 글을 남겼다. 자서전에서 "저다지도 그를 힘차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나의 것으로 삼고 싶었다." 라고 술회했다.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부디 박열과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오로지 박열을 위해 바쳤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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