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갈등, 호계서원 둘러싼 400년 묵은 ‘병호시비’
끝없는 갈등, 호계서원 둘러싼 400년 묵은 ‘병호시비’
  • 이동백 기자
  • 승인 2022.05.1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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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패 복설 문제로 양측 간 법정 시비로까지 비화
지역민들 병호시비를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봐
상계종택운영위원회 등 퇴계문중 후손들은 지난 9월 30일 호계서원에 봉안됐던 퇴계 위패를 사당 밖으로 빼내가 불에 태워 땅에 묻었다.  매일신문 제공
상계종택운영위원회 등 퇴계문중 후손들은 지난 9월 30일 호계서원에 봉안됐던 퇴계 위패를 사당 밖으로 빼내가 불에 태워 땅에 묻었다.   매일신문 제공

경북도는 2013년부터 총사업비 65억 원을 들여 호계서원 이건 및 복원을 추진해 2019년 말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부지에 복설(復設)하고, 2020년에 호계서원 복설 고유제를 봉행했다. 이로써 400년 묵은 병호시비에 종지부를 찍으려 한 것이 오히려 시비를 확대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에 따른 지역 여론도 차갑다.

호계서원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서원 중 하나로 1573년 여강서원으로 창건된 후 숙종 2년(1676년) 사액되면서 개칭한 서원이다.

‘병호시비(屛虎是非)’란 퇴계 이황의 제자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을 호계서원에 배향하는 과정에서 누구의 위패를 윗자리인 퇴계의 좌측에 두느냐는 위차(서열) 문제가 불거지면서 발생한 시비를 말한다. 관직이 높은 서애를 좌측에 두어야 한다는 서애의 후학들(병파)과 나이가 네 살 많은 학봉이 좌측에 가야 한다는 학봉의 후학들(호파)이 맞서면서 발생한 이 시비는 그 후 대산 추배론까지 대두되면서 극단으로 치달았다.

1888년 병・호 양측은 시비를 해결하기 위하여 향연례(鄕宴禮)를 베풀고 “향후 병호의 문제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확약했다. 그러나 양측의 앙금은 가라앉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다.

호계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철거된 지 7년 뒤에 강당만 새로 지은 채 남겨졌다가 안동댐 건설로 1973년 임하댐 아래로 옮겼으나, 습기로 서원 건물 훼손이 우려되자 지역 유림이 나서서 이건과 복설을 요청했다. 이에 경북도는 2013년부터 총사업비 65억 원을 들여 호계서원 이건 및 복원을 추진해 2019년 말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부지에 복설했다.

호계서원 복설 사업을 추진하면서 서애를 퇴계 위패의 동쪽에, 학봉은 서쪽에 두되 그 옆에 학봉의 후학인 대산 이상정을 배향하기로 경북도와 안동시가 중재했다. 서애는 높은 자리를, 학봉은 두 명의 자리를 보장하는 화해안이었다. 두 학맥이 이에 동의하면서 400년간 이어진 영남 유림의 병호시비는 비로소 종지부를 찍는 듯했다.

문제는 2020년 11월 20일 열린 호계서원 복설 고유제를 봉행하면서 발생했다. 2021년 3월 24일 예안향교는 양측 간에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긴 전에는 위패를 복설하지 않기로 한 애초의 약속을 어긴 호계서원 측에 복설한 위패를 철폐하고 원상대로 환원할 것을 촉구하는 입장문을 지역 내 기관단체와 유림, 문중, 언론사 등에 전달했다. 또한 예안향교 측은 합의안과는 달리 위패의 서차를 서쪽부터 퇴계, 서애, 학봉, 대산 선생 순으로 열향(列享)한 것도 문제 삼고 나왔다. 이에 대해 호계서원 측은 향사 후 참석 유림들에게 그간 호계서원의 복설 과정에서 있었던 유림, 종손들과의 협의 과정 등이 담긴 서류를 공개하며 예안향교 측의 주장을 반박했다. 복설 준공 고유제를 치러 400년 묵은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와 화합, 존중, 상생의 유림 대통합을 이뤘다는 기쁨도 잠시, 또 다른 반목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같이 두 세력 간의 이해 상충으로 논란을 빚는 과정에서 2021년 9월 진성이씨 상계종택운영위원회와 문중 관계자 20여 명이 호계서원 사당인 존도사를 찾아 간단한 고유제를 지낸 후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셔 나간 사건까지 일어났다. 모셔 나간 위패는 계상서당 뒤편에서 소송(燒送, 불태워 묻음)되었다. 이 사건으로 호계서원 양호회는 호계서원 퇴계 위패 철폐를 주도한 진성이씨 상계종택운영위원회 관계자 8명을 문화재보호법 위반, 특수절도 및 특수건조물 침입 혐의로 안동경찰서에 고소했다. 이에 대해 이동수 전 안동문화원장은 “형사 고소는 원칙적으로 범죄의 사실이 인정되고 피해자 지위가 확인될 때에 가해자를 고소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고죄에 해당된다”고 반박했다.

호계서원이 퇴계 위패 자리를 비워둔 채 서애·학봉·대산의 위패를 모시고 춘계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매일신문 제공
호계서원이 퇴계 위패 자리를 비워둔 채 서애·학봉·대산의 위패를 모시고 춘계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매일신문 제공

이러한 갈등 가운데 올해 들어와 호계서원은 퇴계 위패 자리를 비워둔 채 서애·학봉·대산의 위패를 모시고 춘계향사를 봉행했다. 이에 앞서 성균관유도회 예안지부 및 예안향친회는 호계서원의 춘계향사 강행을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

한편 병호시비는 지상 논쟁으로까지 비화했다. 문화모임 사랑방 『안동』 194호에 실린 서수용 한국고문헌연구소장의 기고문, 「호계서원 신축년 묘변」이 퇴계 위패 소송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왔다. 서 소장은 이 기고문에서 퇴계 위패 소송은 듣도 보도 못한 과격한 거조(擧措)라며, 퇴계 위패 반환을 비판하면서 훼손된 퇴계의 위패를 하루속히 환안(還安)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이 기고문에 대하여 이동수 전 안동문화원장이 동지 197호에 반박문을 실었다. 위패 철폐의 잘못을 비판한 서 소장의 글이 호계서원 복설에 대한 기본적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임을 논박하면서, 사전 합의를 저버리고 위패를 복설한 호계서원 측에 잘못이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호계서원의 사태를 뜻있는 지역민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법정 시비로까지 번진 것에 대해서는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400년 묵은 병호시비 재연은 시기상으로도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유풍(儒風)이 확고하던 조선 시대에는 위패의 서차를 따지는 데에는 그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 조선 시대의 관습을 고집할 수는 없다. 유림도 변화하는 시대와 보조를 맞춰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병호시비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지역민들은 하루빨리 양측이 갈등의 고리를 끊고, 화합의 계기를 마련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