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깨달음
늦은 깨달음
  • 정신교 기자
  • 승인 2022.05.04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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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추모하여 조문함

평소 존경하는 능소(凌宵) 이어령 선생(李御寧, 1933~2022)의 마지막 인터뷰에 관한 기사를 읽고 추모의 염에 늦으나마 졸필로 조문을 드립니다.

소생은 형과 누이의 서가에서 선생의 수필집을 빌려 읽으며 소년 시절을 보낸 베이비부머 세대의 한 사람입니다.

귀성길에 청년의 친절을 의심하는 자신과 사회에 대한 자성과 동서양 음료 문화에 관한 글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일본의 역사와 정치, 문화, 생활 등에 관한 분석과 통찰력이 담긴 ‘축소 지향의 일본인’은 최인호 작가(崔仁浩, 1945~2013)의 소설 ‘잃어버린 왕국’과 함께 청년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동서 화합의 1988년도 올림픽에서 전 세계가 침묵하는 가운데 굴렁쇠를 굴리며 나타난 소년은 바로 대제전을 준비하고 주재한 선생 자신이 아니었던가요? 대한민국의 전통문화에 관해 국제 사회가 주목하는 계기가 됐지요.

초대 문화부 장관이 되어 창설한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세계로 향하는 한류 문화의 산실로 발전했습니다. 도로의 노견(路肩)을 갓길로 바꾼 것은 한글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쾌거로 기억됩니다. 당신께서도 ’갓길 장관‘으로 불리는 것을 즐거워하시지 않았습니까?

선생께서는 진작부터 타자기로 글을 쓰시고 컴퓨터 작업에도 조예가 있어서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선생(白南準, 1932~2006)과 협업으로 5만여 개의 공병을 재활용해서 대전 엑스포를 대표하는 재생조형관을 설치하셨지요.

21세기 초두에는 디지털 문화로 대표되는 컴퓨터 과학과 아나로그 전통 문화가 융합되는 ’디지로그(Digilog)‘를 패러다임으로 제창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호마의북풍(胡馬依北風), 월조소남지(越鳥巢南枝)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백일 상을 차려 주신 모친과 국제변호사인 따님을 간간이 언급하심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니겠습니까?.

수년 전 췌장암 선고를 받고는 수술과 항암 치료를 마다하시고 오로지 후대를 위한 저술과 강연에만 열중하셨습니다.

선생께서는 약관에 원로들의 권위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우상의 파괴’로 등단하셔서 향년 88세로 졸하시는 그날까지 섬광처럼 빛나는 말과 글로서 겨레의 앞길을 통찰하고 예지하신 큰 어른이셨습니다.

이제 선생의 피와 살, 그리고 DNA는 당신께서 일평생 사랑하고 가꾸어 오신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대자연의 먹이 사슬로 한겨레에게 영원무궁하게 전파되고 승화될 것입니다.

 

늦은 깨달음

 

뒷산 달빛 가랑잎새 없다면

마당귀

살구나무 살구꽃 봉오리들 없다면

저 서해 칠산바다 파도 밑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참조기 떼 없다면

그 참조기 떼 귀신들 없다면

나는 너를 사랑하지 못한다 동해 울릉도의 옥아 순아

고은(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