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이렌 네미롭스키 '무도회'
[장서 산책] 이렌 네미롭스키 '무도회'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2.05.01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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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도 삶도 믿지 않는 자가 쓴, 그리하여 세상도 삶도 이해하게 하는 소설

이 책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유대인 작가 이렌 네미롭스키(Irène Némirovsky, 1903~1942)의 단편소설집이다. ‘무도회’(7~76쪽), ‘다른 젊은 여자’(77~86쪽), ‘로즈씨 이야기’(87~116쪽), ‘그날 밤’(117~141쪽)이 실려 있다.

1. 무도회

증권으로 큰돈을 번 알프레드 캉프는 새 아파트로 이사한다. 캉프 부인(로진 캉프)은 사춘기에 접어든 14살짜리 딸 앙투아네트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영국인 가정교사 미스 베티를 나무란다. 캉프 부부는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무도회를 열기로 한다. 200통의 무도회 초대장을 쓴 앙투아네트는 무도회에 15분 정도만 참석하게 해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한다.

캉프 부인의 심부름으로 초대장을 부치러 간 미스 베티는 연인과 만날 생각으로 앙투아네트에게 초대장을 우체통에 넣어달라고 부탁한다. 앙투아네트는 어머니에 대한 반감으로 초대장을 모두 찢어서 센강에 던져버린다.

무도회 날, 앙투아네트가 미리 초대장을 준 피아노 개인교사 이자벨만 참석하고 아무도 오지 않는다. 캉프 부부는 서로를 탓하며 싸운다. 남편인 알프레드는 집을 나가버린다. 캉프 부인은 앙투아네트에게 ‘너 밖에 없다’면서 딸을 품에 안는다.

“아! 내 가엾은 딸, 내 가엾은 앙투아네트, 넌 정말 행복한 거야. 세상이 얼마나 부당하고 악하고 음험한지 넌 아직 모르잖아. 나에게 미소를 보내고 날 파티에 초대했던 그 사람들, 실은 내 등 뒤에서 날 비웃고 있었어. 내가 그들 세계의 사람이 아니어서 날 멸시했어. 천하에 몹쓸 것들, 빌어먹을…, 넌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내 가엾은 딸! 그리고 네 아빠! …아!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그녀가 갑자기 이렇게 말을 마쳤다.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내 가엾은 딸….” 그녀는 딸을 품에 안았다. 앙투아네트가 아무 말 없이 얼굴을 진주 목걸이에 파묻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딸이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녀가 말했다. “넌 착한 아이야, 앙투아네트….” 바로 그 순간,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찰나의 순간, 한 사람은 올라갔고, 또 한 사람은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그렇게 ‘삶의 길 위에서’ 엇갈렸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앙투아네트가 부드럽게 되뇌었다. “내 가엾은 엄마….”(74~75쪽)

2. 다른 젊은 여자

질베르트는 푸른색 모직 실을 사기 위해 마들렌이 주인으로 있는 가게에 간다.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눈이 그치기를 기다리며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눈다. 마들렌은 전쟁에서 부상당한 프랑스군 병사를 나흘 동안 돌봐주었다. 질베르트는 마들렌에게 그 병사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지 물었고, 마들렌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대답한다. 질베르트는 마들렌의 가족 사진을 보고 자기가 마들렌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마들렌이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가 사진 한 장을 들고 돌아온다. 큼직한 가족사진이다. 전쟁 두 달 전, 큰오빠 결혼식 때 찍은 것이다. 질베르트는 그 모든 얼굴 중에서 열정 가득하고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 여자의 얼굴을 찾는다. 그런 얼굴이야말로 거기에 깃든 영혼에 걸맞을 테니까. 하지만 마들렌은 건강하고, 천진난만하며, 질베르트 자신처럼 약간은 되바라져 보이는, 못 생기지도 예쁘지도 않은 젊은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이 사람이 아주머니예요?” 수시로 거울을 들여다보고, 툭하면 토라지고, 버럭 화를 내고, 생쥐를 무서워할 것 같은 평범한 젊은 여자. 질베르트는 아주 부드럽고 복잡한 자존감이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 역시 필요하다면 사랑을 베풀고 괴로움에 몸부림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85~86쪽)

3. 로즈 씨 이야기

독신에다 부자인 로즈 씨는 자신의 돈을 투자할 곳과 세금을 회피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로즈 씨는 한 때, 예쁘고, 착한 여자와 결혼을 약속했다가 다음 날 줄행랑을 쳤다. 그 후 로즈 씨는 그 여자를 잊고 혼자 살아왔다.

2차대전이 시작되자 로즈 씨는 기사 로베르와 함께 피난길에 오른다. 배가 고픈 로즈 씨가 음식을 구하러 간 사이 로베르는 차를 몰고 사라진다. 피난민의 대열에서 로즈 씨는 군대에 입대하려는 마르크 보몽이라는 청년을 만나 함께 걷게 된다.

폭격으로 마르크가 부상을 당하자, 로즈 씨는 혼자 탈 수 있는 차를 거절하고 마르크와 걷기로 한다.

자동차가 서둘러 출발했다. 로즈 씨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게 끝이었다. 그는 이제 죽은 목숨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이 아이 때문에? 그는 옆에서 소리를 지르는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다리 위에 있어요! 사람들, 차들이 있다고요!” 그 혼란 속에서 그 끔찍한 무질서 속에서, 다리가 너무 일찍 폭파되는 바람에 피난민의 차들이, 로즈 씨가 타기를 거부했던 차까지도, 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로즈 씨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며 마르크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에 타지 않은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깨달으면서.(116쪽)

4. 그날 밤

남편이 젊은 애인과 달아난 뒤 카미유는 니콜과 함께 알베르트를 찾아간다. 카미유의 동생 알베르트는 블랑슈, 마르셀과 크리스마스 휴가를 함께 보내고 있었다. 셋 다 미혼이다. 카미유가 불행했던 결혼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블랑슈와 마르셀은 결혼하지 않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알베르트는 카미유와 형부가 싸우는 것을 보고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카미유는 그날 밤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충만했던 밤이라고 말한다.

가장 유순한 성격의 블랑슈 아주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확실한 건….” 그녀는 말을 마치지 않았다. 마르셀 아주머니가 입술을 깨물며 거만하게 말했다. “그런 기쁨은 다른 여자들의 몫이야, 카미유, 내가 장담해.” “하지만 언니가 아까는, 아까는….” 알베르트 이모가 외쳤다. “아까는 내가 불행했다고 했지.” 엄마가 끼어들었다. “사실이야. 난 네가 부러워. 너희의 평화로운 생활이 부러워. 하지만… 난 풍요로웠고, 가득 채워졌었어. 그런데 너희는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지.” 그러자 나의 이모 알베르트가 뜨개질감을 떨어뜨리고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깜짝 놀란 엄마가 애석해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녀를 달래러 갔다. 하지만 이모는 엄마를 뿌리쳤다. “왜 그러니, 알베르트? 나도 알아, 이해해, 내가 가여워서 우는구나….” “언니가 가엾다고? 오! 천만에! 가여운 건 언니가 아니야.” 그러고는 고통과 앙심이 묻어나는 말투로 덧붙였다. “언니는 이 모든 걸 우리한테는 절대 얘기하지 말았어야 했어!”(140~141쪽)

우리에게 아직 낯선 이렌 네미롭스키는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유대인 작가로, 투르게네프와 모파상을 떠올리게 하는 힘차고 잔인한 필치로 자신의 가족사, 혁명과 전쟁에 관통당한 유대인과 프랑스인의 초상을 그린 걸작을 여럿 발표했다.

‘무도회’는 이렌 네미롭스키가 프랑스에서 작가 활동을 막 시작한 1929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서로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엄마와 딸 사이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그린 사실적인 작품이다.

‘무도회’가 실패한 무도회를 통해 ‘삶의 길 위에서’ 모녀의 여정이 엇갈리는 순간을 보여주듯, 이렌 네미롭스키의 다른 단편들 역시 번뜩이는 역설과 아이러니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운명이 교차되는 순간들을 포착한다.

이 선집에 실린 ‘다른 젊은 여자’(1940), ‘로즈 씨 이야기’(1940), ‘그날 밤’(1942)은 프랑스 비시 정권의 유대인 검거가 본격화되어 서서히 작가의 숨통을 조여오던 시기에,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작가가 생활고와 공포에 시달리며 쓴 작품들이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은 뒷표지에 실린 소설가 한지혜의 추천사로 대신한다. ‘누군가의 욕망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연민하기는 어렵다. 연민은 그 욕망의 못남, 혹은 찌질함이 내 것이기도 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아주 쉽게 회피의 언어로 욕망을 비난할 때, 이렌 네미롭스키는 직설의 언어로 욕망을 연민한다. 여기에 실린 소설들은 가식과 허세로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엄마나 이웃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비아냥이면서 동시에, 그들에 대한 안쓰러움이기도 하다. 세상도 삶도 믿지 않는 자가 쓴, 그리하여 세상도 삶도 이해하게 하는 역설이 네 편의 소설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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