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명장] '대한민국 제 47호 목공예 김재욱 명장'을 찾아서
[명인 명장] '대한민국 제 47호 목공예 김재욱 명장'을 찾아서
  • 정양자 기자
  • 승인 2022.04.2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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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서 가구공이 되었고, 즐겁게 일을 하다보니 대한민국 목공예 명장이 되었다
'수필과지성 아카데미'에서 꿈을 키우고,
수필 등단작가로서 포부도 가지고 있어

대구시 수성구 지산동 아파트에서 대한민국 제47호 목공예 명장 김재욱(84) 씨를 만났다.  

대한민국 제 47호 목공예 김재욱 명장  정양자 기자
대한민국 제 47호 목공예 김재욱 명장   정양자 기자

김재욱 명장은 지하철 청라언덕역 '대구 숙련기술명장 명예의 전당'에 올려져 있는 33인 중 한 사람이다. 19세부터 77세까지 60년 가까이 목가구공으로 외길을 걸어온 김재욱 명장을 만나 목공예와의 인연과 자신만의 철학에 대해 들어 보았다.

 

-선생님은 우리나라 목공예분야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명장이십니다.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1939년 안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빈농가정의 4남매의 막내였습니다.  1991년 대한민국 목공예 명장 47호로 선정되었습니다. 

 

 - ‘목공예’라고 하면 김재욱 명장을 떠올립니다. 유년 시절, 어떤 계기나 동기로 목공예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 어린 시절 누구나 어려웠지만 우리 집은 특히 어려웠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시고 어머니 홀로 농토도 없이 시골에서 4남매를 키우셨습니다. 좋은 옷은 말할 것 없고 좋은 음식을 먹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 고모님집 사랑채에서 콩깻묵을 서리해 먹고 물을 한 바가지 들이키면 배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시절은 저의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환경이 그렇다보니 배부르게 먹고, 좋은 옷 입고, 공부를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공부를 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안동 경덕중학교에서 장학생 모집한다는 광고지를 우연히 보고 응시했습니다. 다행히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배고픈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에 가구견습공으로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일을 배운지 6개월 만에  3년 일한 사람과 같은 보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일의 습득이 빠르고 소질도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지하철 청라언덕역 '대구 숙련기술명장 명예의 전당'에 올려져 있는 33인 중 한 사람 김재욱 명장.  정양자 기자
지하철 청라언덕역 '대구 숙련기술명장 명예의 전당'에 올려져 있는 33인 중 한 사람 김재욱 명장. 정양자 기자

-그 동안 수상경력과 심사경력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남다른 비결이 있는지요.

▶ 비결은 즐기면서 작업하는 것입니다. 반세기 이상 목가구공으로서 외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목공예가 적성에 맞아서 그런지 일이 흥미로웠습니다. 군대에 입대해서도 저의 직업을 늘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동료들은 "저렇게 자기 직업을 좋다고 자랑하는 사람 처음 봤다"라며 수근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좋아서 하는 일이다보니 성과도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1979년부터 각종산업디자인전과 목공예전에 출품하여 수상한 이력은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대략 200여 차례 수상한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큰 가구공장의 목공장으로 근무하거나 직접 공방을 운영하며 스스로 작업을 해왔을 뿐만아니라 많은 제자도 길러냈습니다. 1980년부터 최근 5년 전까지 많은 기능올림픽에서 심사위원을 맡았습니다. 이런 공로와 목공예가로서 우수성을 인정받아 1991년 대한민국 산업명장이 되었고, 2000년엔 대통령산업포장을 받았습니다. 

 

- 선생님 작품만이 가지고 있는 기법이나 기술이 있는지요. 소개해 주시죠.

▶ 옛날의 기법과 재료를 그대로 재현하여 똑같이 만드는 전승품과 옛날의 기법과 재료를 사용하되 작품의 외형은 변화를 줄 수 있는 전통품을 두루 작업했습니다. 작품은 모두 주문 생산했습니다. 주력했던 분야는 제상과 주독 등 전통제기입니다. 제상을 만들게 된 동기는 30여 년 전 경북대박물관학교에서 수학할 때, 경북대에서 전통제례를 재연하며 책상을 전통제상 대신 쓰는 것을 보면서부터였습니다. 제상과 신주를 모시는 주독 등 제기를 만들지 않으면 전통이 끊길 위기가 느껴졌습니다. 당시 첫 번째 만든 제상은 경북대 예절학교에 기증했습니다. 

 

-다시 목공예를 처음 시작했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선택하고 싶은 직업이 있나요.

▶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또 다시 목공예를 선택할 것입니다. 천직으로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평생 목공예에 전념했습니다. 자랑으로 여겼고, 또 많은 것을 이뤘습니다. 무엇보다 배고픈 시절을 면하게 해줬습니다. 가정을 일구고  번듯하게 자식들을 키운 것 역시 목공예를 직업으로 택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제 47호 목공예 김재욱 명장의 현역시절 작업실에서 모습.  김재욱 명장 제공
대한민국 제 47호 목공예 김재욱 명장의 현역시절 작업실에서 모습. 김재욱 명장 제공

-취미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있나요? 있다면 소개해 주시죠.

▶ 어느 철학자의 묘비에 적힌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 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처럼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고 끊임없이 학습하며 자신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한 때 예절교육에 심취한 적도 있었고, 논어,  컴퓨터, 게이트볼, 명심보감, 역학 등 다양한 취미 활동을 했습니다. 

몇 해 전 '수필과지성 아카데미'에서 장호병 교수님의 지도를 받으며 수필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글쓰는 재미에 푹 빠졌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글공부를 하면서 할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최근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아카데미 동기를 보며 더욱 용기가 생겼습니다. 저도 보다 완성도 놓은 작품으로 공모전에 당선되어, 노익장을 과시하고 싶다는 포부도 생겼습니다.  

 

-앞으로 개인적인 소망이 있으신지요.

▶ 움직일 수 있을 때 취미생활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양식을 많이 쌓고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나눠주고 봉사할려고 합니다. 기술이나 지식을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요즘도 '수필과지성 아카데미'에서 장호병 교수님의 심화반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수필가로서 또다른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대한민국 명장으로서, 수필작가로서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김재욱 명장의 생생한 삶은 격동기를 살아온 부모님들의 역사 이야기였다. 명인의 손끝에서 선진국 대한민국으로 우뚝 서게 한 힘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