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대 왕릉 중에서 가장 완벽하고 화려하다는 평을 듣는 경주 원성왕릉은 피장자(매장되어 있는 사람) 문제로 가장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왕릉 중의 하나이다. 5번이나 이름이 바뀌는 수난을 겪었다.
처음 매장 당시의 신라38대 ‘원성왕릉’에서, 이름을 알 수없는 ‘괘릉’으로, 다시 신라 제30대 ‘문무대왕릉’을 거쳐 또 다시 ‘괘릉’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최근에 와서야 원래 이름인 제38대 ‘원성왕릉’임이 밝혀져 다시 원래 이름을 찾게 되었다.
‘괘릉’은 누구의 왕릉인지 모르지만 연못 속에다 장사지내면서 걸 괘 자를써서 괘릉이라 했다
괘릉은 ‘삼국유사’(1281)가 편찬된 이후 이름을 모른다고 기록한 ‘동경잡기’(1669)가 편찬된 사이, 즉 388여 년이 지나는 동안에 서서히 제 이름을 잃어버렸다.
최치원이 지은 ‘승복사비’를 오랜 세월 지나서 땅속에 묻혀있는 걸 박정희 시절에 경주시에서
복원했는데. 승복사비에서 5리 떨어진 곳에 원성왕릉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원성왕릉으로 밝혀져 문화재청에서도 지금껏 공식 명칭이었던 ‘경주괘릉’을 2011년 11월 28일자로 ‘경주원성왕릉’으로 변경 고시하게 되었다.
경주 토함산 불국사 인근에 원성왕릉이 있다(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원성왕릉은 능을 만들때 물 속에다 장사를 지내면서 돌 위에다 관을 걸고 만들었다고 걸 괘 자를 써서 괘릉으로 불린다. 마을 이름도 괘릉리다. 이 조그마한 시골은 온통 문화재로 가득한 문화재의 보물창고다.
원성왕릉은 사적 제26호로 지정되었고, 능에 있는 석상 및 석주는 보물 제1427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외동읍을 원성왕릉읍으로 명칭을 바꾸고자 하는 지역민들의 열망도 있다. 원성왕릉을 비롯해 산재한 관내 많은 문화재를 한데 엮어 역사문화 관광사업을 벌여, 경주를 찾는 관광객과 함께 인접한 100만 인구의 울산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지역민들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