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바덴바덴에 소나기 내리다
[인문의 창] 바덴바덴에 소나기 내리다
  • 장기성 기자
  • 승인 2019.03.27 15:37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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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바덴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지가 최종 결정된 곳으로 우리에겐 낯설지 않은 친숙한 도시다. 하지만 1981920일 서울 개최를 위해 한국 올림픽 유치단이 그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분위기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유치위원 및 지원단이 90, 기자단 15명 등 대규모의 지원부대가 몰려가자 IOC 사무처에선 도대체 이 자들이 왜 이렇게 많이 왔나?”라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유치단이 이곳에 도착한 지 이틀 후인 922일 서울올림픽 유치전시관 개관식이 열렸다. 옛 바덴바덴 기차역에 차려진 전시관에선, 미스코리아 출신 3명과 대한항공 스튜어디스 5명이 안내를 맡았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미인들이 나긋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유창한 영어와 불어로 설명하는 한국관은 금세 인기를 독차지하게 된다. IOC 위원들 중 여럿은 몇 번이고 한국관을 찾았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 개최지로 IOC 사마란치 위원장이 세울’(Seoul)이라고 명명했을 때, 우리 유치단이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지르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독일에 체류중일 때, 꼭 방문해야 할 도시 톱 10 목록 가운데 바덴바덴은 상위권에 랭크되어있 었다. 이 톱 10은 일종의 체류기간 중의 버킷리스트 역할을 한 셈이다. 앞에서 말한 88올림픽의 개최지 최종선정 장소를 직접 보고 싶은 욕망도 컸지만, 그보다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내게 있었다. 대학시절 수업시간에 감명 깊게 들었던 콜티츠(Choltitz)’ 라는 장군 때문이다. 언젠가 한번 그가 잠들어있는 묘비를 직접 찾아가보고 싶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파리는 개전통보 1개월 만에 별 저항 없이 독일군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프랑스의 중심가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는 독일군을 본 파리 시민들은 울분을 삼키며 독일군에게 손을 흔들어야 했다. 굴욕이었다. 하지만 194466일 독일을 격퇴하기위해서 프랑스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했다. 이것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이른바 인천 상륙작전이다. 1950915일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군사작전인데, 노르망디 작전과 매우 흡사하다.

연합군의 성공적인 노르망디상륙으로, 독일군은 노르망디와 캉 지역에서 연합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해 815일 연합군과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파리가 독일점령군으로부터 해방되기 직전, 히틀러는 파리에 주둔한 독일 점령군사령관 콜티츠에게 파리를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파리를 적의 손에 넘겨줄 바에는, 차라리 완전히 파괴하여 더 이상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한 고약하고 괴팍한 심사였다.

독일점령군은 에펠탑,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콩코드 광장 등 파리의 주요 유적지와 베르사유 궁전 같은 건축물에 폭약을 설치하였으며, 파괴된 도시에 전염병이 퍼질 수 있도록 상하수도까지 모두 끊어버릴 준비를 완료하고, 점령군 사령관인 콜티츠 중장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독일군 대부분은 이미 동쪽으로 퇴각하였지만, 2만 명 정도는 아직 파리 시내에 남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콜티츠는 고민에 빠졌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군인은 전시에 최고사령상관의 명령을 무조건 복종해야하지만, 파리를 송두리째 파괴한다면 세계적으로 아름답고 낭만적인 도시가 일순간 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콜티츠 중장은 오랜 고심 끝에 파리를 파괴하지 않기로 내심 결심하고, 자신의 직속 부하들을 한 명 한 명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 무렵 독일 총사령부의 히틀러 총통에게서 전화가 왔다

 

히틀러: “콜티츠 장군,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

콜티츠: (대답이 없음)

히틀러: “콜티츠, 듣고 있는가?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콜티츠: (수화기를 열어 놓은 채 대답이 없다)

 

히틀러의 다급하고 화난 음성이 수화기를 통해서 계속 흘러 나왔다.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는 계속된 독촉에도 콜티츠는 대답을 유보한 채, 2층의 사령관사무실에서 계단 아래로 한 발짝 한 발짝 내려가고 있었다.

사무실 뒤편 정원에 붉은 색 스웨터를 입은 소녀가 엄마 쪽을 향해서 뛰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딸 모습이 문득 떠오르면서, 그 소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가엔 벌써 이슬이 맺혔다. 그리고 그는 2만명의 부하들과 함께 연합군에 투항하고 만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그는 그 유명한 연합군이 주도하는 독일의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관: “당신은 군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왜 따르지 않았나?”

콜티츠: “최고사령관인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었습니 다.”

 

그는 간명하게 대답했다. 진정한 애국과 군인정신이 무엇인지를 다시 되새기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는 순순히 자발적으로 연합군에 투항한 점과,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면서까지 파리를 폭파하지 않은 점이 인정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57년에 감옥에서 석방된 그는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정착했다.

전쟁이 끝난 지 20여 년이 지난 1966년 여름, 독일의 작은 도시 바덴바덴에서 그는 생을 마감하고 이곳 공동묘지에 묻혔다.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치에 대항하여 싸웠던 연합군 장교들이 추모를 위해 그곳으로 모여든 것이다. 장례식을 찾은 연합군 장교들과 파리 시민들은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파리를 구한 공을 기렸다. 히틀러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파리를 지킨 나치 장군 콜티츠, 그는 비록 전범이었지만 그의 용기 있는 결단 덕분에 지금도 아름다운 도시 파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콜티츠의 역사적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나는 어느덧 바덴바덴의 그의 묘비 앞에 서있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희석된 묘비였지만, 그의 이름은 또렷이 보였다. 불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몇 명의 부인들은 그의 묘비 앞에서 조화를 놓고 묵념을 하고 있었다. 묘한 느낌이 든다.

군인의 최대 사명인 명령 불복종자가 왜 존경을 받아야하는지에 관한 문제들, 또 만약에 독일이 2차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지금도 그는 독일이나 프랑스로부터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을까 하는 현실론 앞에서 한참동안 그곳에서 이런 생각으로 골몰했다.‘히틀러를 만난 사람들은 그가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면, 처칠을 만난 사람들은 스스로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앤드류 로버츠의 말은 오늘날 리더의인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역사는 늘 승자의 편에서 기술되는 것일까? 풀려지지 않은 방정식을 끌어안고 바덴바덴을 떠날 때, 때마침 소나기가 쏟아져 나의 풀리지 않는 가슴을 더욱 흠뻑 적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