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허굴산 진달래꽃 향기에 빠지다
합천 허굴산 진달래꽃 향기에 빠지다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04.12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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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하나 울러 메고는 기어이 산을 찾는다
달팽이처럼 머리를 돌돌 말아 연두색으로 고개를 내민 고비가 싱그럽다
지금은 외출 중인지 문을 두드리고 불러도 기척이 없다
하산 길에서 쌓인 피곤이 순식간에 반감이다
등산로를 따라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 꽃. 이원선 기자
등산로를 따라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 꽃. 이원선 기자

봄날의 따뜻함이라고 치부하기엔 피부가 말하길 후텁지근한 날씨란다. 우수와 경칩 사이를 저울질하던 해토머리가 어제만 같은데 그새 봄이 끝나는가 싶다. 계절상으론 아직 봄의 중간 허리인데 싶어 허무하기까지 하다. 아닌 게 아니라 강릉의 한낮 기온이 30도를 울라 섰다는 기상청의 보도에는 성급한 초여름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이미 정해 놓은 길은 가야만 한다. 봄 옷도 여름 옷도 어정쩡한 분위기에 배낭 하나 울러 메고는 기어이 산을 찾는다. 합천으로 길을 잡아 달려간다.

경남 합천군 가회면 월계리와 대병면 장단리에 걸쳐 있는 허굴산(墟窟山, 해발 681.8m)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하지만 인접한 봉화산(금성산), 악격산과 더불어 험준하기로 이름난 산이다. 산명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허굴산 등산로에서 바라보면 산 중턱 굴 안에 부처님이 앉아 있는 것 같아 바랑을 벗어 놓고 올라가 보면 부처님은 없고 허굴만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바랑거리’란 지명은 중이 바랑을 걸어 놓았다 해서 지어진 지명이라고 한다. 한편 허굴산에는 허굴, 용바위, 장군덤 등이 있어 쏠쏠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등산로 입구에 있는 안내판. 이원선 기자
등산로 입구에 있는 안내판. 이원선 기자

등산코스는 올라갈 때는 1코스로 약사서원, 코끼리바위를 거쳐 정상을 올랐다가 하산은 3코스로 분기점(양리, 청강사)을 거쳐 664봉, 안동권씨 묘역을 지나 원점 회귀로 정했다.

마을 입구에 있는 공터에 주차를 하고 10여 분간을 오르자 천강사 바로 앞이다. 천강사 주위로는 때늦은 벚꽃이 여태껏 피어 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한 잎 두 잎 꽃잎을 떨구어 낸다. 파란 하늘 아래서 난분분 바람을 타다가 흩어져 길 가장자리로 소리 없이 쌓여만 간다. 소복소복 쌓인 모양새가 겨울 한낮의 눈을 보는 듯 고결해 보인다. 밑동은 굵어 거무튀튀한 줄기를 치켜 올라 분필을 찍은 듯 점점이 날아 붙어 뽀얀 점을 찍었다. 집채만 한 바위를 얼룩말의 줄무늬 모양 하얗게 늘어져 뒤덮인다.

마냥 초입의 분위기에 취할 수는 없다. 마음을 다잡고 오르는 등산로 주변으로 노란색, 자주색, 하얀색의 제비꽃이 늦은 봄 마중을 나와 수줍게 반긴다. 몇 발작을 더 오르자 솔가리와 낙엽을 뚫고 달팽이처럼 머리를 돌돌 말아 연두색으로 고개를 내민 고비가 싱그럽다. 풋풋하게 다가드는 모습에 보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가시는 기분이다.

등산로 가장자리에 오소리가 판 것으로 보이는 굴이 있다. 이원선 기자
등산로 가장자리에 오소리가 판 것으로 보이는 굴이 있다. 이원선 기자

생명의 오묘한 진리 앞에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발밑에다 온통 신경을 기울여 한발 두발 오르는 등산로 주위로 새 생명의 기운이 여기저기에 질펀하다. 봄의 하모니를 이루어 서로를 격려 중에 태양을 향해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고 있다.

등산로 초입이 새 생명의 신비로 가득하다면 거북바위를 지나면서부터 온통 진달래 천지다. 여수 영취산이나 거제 대금산에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2~3m의 수고에 가지가지마다 조롱조롱 꽃을 매달아 등산로를 따라 잔치를 벌이고 있다. 그중에는 벌써 봄에 지쳐선지 등산로 아래를 부질없이 낙화, 좁은 소로의 산길을 따라 붉은 등을 점점이 밝히는 꽃들도 있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의 한 소절 “가시는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밝고 가시옵소서”의 떠나는 임에 대한 애절함을 떠나서, “나보기가 역겨워서”가 아니라 아니 밟고는 갈 수가 없으매 사뿐 사뿐 밟으며 오른다.

위험 구간은 쇠사슬로 안전을 확보하고 있다. 이원선 기자
위험 구간은 쇠사슬로 안전을 확보하고 있다. 이원선 기자

본격적인 등산로에 접어들자 인접한 봉화산(금성산), 악격산과 더불어 험준하기로 이름난 산으로 알려진 만큼 발걸음은 더디고 숨은 가쁘다. 톡톡히 이름값을 하고 있는 모양새다. 얼마를 더 오르자 험준한 산길 중간 중간으로 밧줄이 걸리었다. 더 험한 곳에는 쇠사슬을 걸쳐서 안전을 확보하고 있다.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구간이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다. 대신에 탁 트인 바위에 올라서면 발아래로 펼쳐지는 조망은 가히 일품이다.

극심한 겨울 가뭄에도 마늘은 밭이랑을 가득 메워 숲을 이루어 푸르다. 그 옆으로 어깨를 맞대어 올망졸망한 다랑이 논으론 도연명은 사시(四時)에서 읊은 봄처럼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봄철에 눈 녹은 물이 사방의 연못에 가득하고)이다. 어느새 들판으론 봄볕이 풀어내는 연두색으로 단장이 한창이다. 봄의 싱그러움이 저 아래 쪽으로 푸른 양탄자처럼 펼쳐지고 있다. 누구는 내려올 산 왜 힘들게 왜 오르나 묻지만 이만한 이유에 구경거리도 없다. 오르는 자만이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특혜이자 혜택이다.

거북바위 너머로 오도산이 아련하게 보인다. 이원선 기자
거북바위 너머로 오도산이 아련하게 보인다. 이원선 기자

흰 바지저고리에 밀짚모자를 쓴 소를 모는 농부가 논 가운데를 오락가락 한다면 봄의 서정에 한참이나 젖어 들것만 같다. 과거의 회상에 젖어 들어 뜬금없는 눈물방울이라도 흘리리라! 소맷자락으로 먼지를 쓸어내듯 얼굴을 쓸어내어 문지를 지도 모른다. 어쩌면 땀에 찌든 삼배적삼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환상을 좇아 하늘을 쳐다볼지도 모른다.

문득 고목의 우듬지쯤에서 ‘따르르륵, 따르르륵’하는 나무 파는 소리가 들린다. 죽은 나무둥치를 쪼아 벌레를 찾는 오색딱다구리의 부리 부딪치는 소리다. 어디에 앉아 있을까? 실없이 찾노라고 허공에다 눈을 박아보지만 시린 하늘만 공허할 뿐이다. 한강에 빠진 바늘 찾기도 아니고 이내 포기다. 눈을 내려 발밑으로 굽어보는 질펀한 들판엔 우람한 체구의 트랙터가 점심을 재촉하는 양 늘어진 소불알처럼 오락가락하고 있다.

다시 힘을 내어 오르는 산길 가장자리에 땅굴 하나가 덩그렇게 입을 벌려 깊이 파였다. 오소리가 팠을까? 너구리가 팠을까? 굴의 형태로 보아 주인은 오소리가 분명한데 가는 날이 장날인가? 지금은 외출 중인지 문을 두드리고 불러도 기척이 없다. 농담 삼아 “불 한번 지펴 봐!”라고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건조한 봄철을 맞아 여기저기서 달갑지 않은 소식이 연일 끊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불이라니 큰일 날 소리다. 아닌 게 아니라 이날도 전국을 들어 산불소식이 심심찮은데 황매산 서쪽 산허리론 헬기가 날아다니고 있다. 희뿌연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상태로 보아 산불인 듯싶다.

정상에 오르자 아담한 표지석이 가쁜 숨을 내쉬는 등산객을 조용히 맞이하고 있다. 좌우를 둘러보자 동쪽으로는 오도산이 육중한 안테나를 하늘을 찌를 듯 삐죽이 세워 우뚝하고, 북쪽으로는 황매산이 질펀하게 허리를 펼쳤다. 산허리로부터 시작된 진달래 꽃밭은 정상에서도 여전하다. 벌써 점심시간인가? 시장기가 도지고 배꼽시계가 운다. 각자 가지고온 점심을 펴는데 김밥이 대세다. 농담 삼아 “이제 다들 구박 덩어리인가? 집에서 받는 사랑은 남 이야기 같은 모양이네!”하는데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딱히 반박할 마땅한 말대답에 문구가 없다.

등산로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낙화한 진달래꽃. 이원선 기자
등산로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낙화한 진달래꽃. 이원선 기자

하산 길에도 여전히 산등성이를 따라서 진달래 꽃밭이다. 별 기대 없이 찾은 산에서 눈이 호강을 맞은 날이다. 하지만 등산로는 여전히 들쑥날쑥한 것이 험하다. 초입에서 본 안내 지도에 따르면 무난해서 미끄러지듯 내려오면 되는 줄로만 알았다. 순한 소가 앉은 잔등을 타고 넘는 정도로 수월할 줄 알았다. 하지만 오리내리는 폼이 거친 톱니바퀴를 닮았다. 어느 누구는 설악산 공룡능선의 축소판 갔다며 엄살이다. 대신 볼거리는 지천에 널려있어서 심심할 겨를이 없다. 하지만 한 고비를 넘으면 또 한 고비가 기다린다. 지그재그로 반복이 되는 가운데 커다란 바위들이 엉기성기 엉긴 위로 오르면 발아래의 조망에 눈이 황홀하다. 하산 길에서 쌓인 피곤이 순식간에 반감이다.

금년 들어 진달래꽃은 TV이나 신문 지상 등을 통해서 소식을 접했는데 봄 산행에 나선 덕에 실컷 구경이다. 산해진미를 포식한 기분으로 꽃기운이 넘쳐 난다. 옷에도 몸에도 온통 진달래 향기와 물로 염색을 한 기분이다. 사위어가는 봄날에 진한 추억 한 자락을 가슴 위에 살포시 내려놓는 날이다. 뒤돌아보는 산 중턱으로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이 염불을 하는 듯도 보인다. 배낭 대신에 바랑이라도 짊어지었다면 바랑거리에 걸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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