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페레야슬라프
다시 쓰는 페레야슬라프
  • 정신교 기자
  • 승인 2022.03.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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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의 꽃과 열매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피를 흘리며 크렘린궁을 두드리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1952~) 러시아 대통령의 야욕으로 시작된 침략 전쟁이 우크라이나 정부와 국민들의 결사 항전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유엔과 미국 등 자유 우방국들의 규탄과 각종 제재로 말미암아 러시아 정부는출구 전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드니프르 강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광활한 흑토 지역에 슬라브 민족이 세운 키예프 루스 공국이 몽골군의 침입으로 와해되자,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이곳은 변방이라는 뜻의 우크라이나로 불리게 됐다.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모여든 자유 전사라는 뜻의 코자크들(코자키)은 드니프르강 연안에 요새(시치)를 만들고 집단생활을 하면서 경작과 목축, 어로와 교역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코자키는 자발적으로 무예를 수련하고 군대를 양성하고 족장(헤트만)을 선출해서 질서를 유지하고 외적을 막았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와의 전투에서 연패한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1595~1657)는 모스크바 공국의 짜르와 페레야슬라프 협약(1654)을 맺게 된다. 타라스 불바’는 폴란드 공주를 사랑하는 아들을 처단하는 헤트만의 이야기를 담은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의 소설이며 영화(대장 부리바)로도 만들어졌다.

페레야슬라프 협약으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변방 또는 연방으로 존속하면서 수많은 전란에 휩싸이고 홀로도모르 대기근(1930)과 체르노빌 핵발전소 붕괴 사고(1986)와 같은 엄청난 고난을 겪게 된다. 코자키는 짜르의 친위대가 되어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정벌에 앞장서서 러시아의 변경을 개척하기도 했다.

소련의 붕괴로 독립한 이후에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통제를 받아 왔으며 크림반도의 병합과 같은 주권과 영토의 직접적인 침해를 입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의 친서방·탈러시아 정책이 가속화될수록 러시아의 압제는 정도를 더했으며 그 배경에는 페레야슬라프가 있었다. 많은 러시아인은 아직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푸틴 대통령도 그의 역사논평에서 페레야슬라프 협약으로 두 나라는 하나가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야흐로 수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 잉태되고 단련되어 온 코자크의 후예인 우크라이나인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소망이 전화위복(轉禍爲福)으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젤렌스키(1978~) 대통령과 국민은 러시아의 침략 전쟁에 결사적으로 항전하고 있으며 자유 우방국들은 물심양면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

전의를 상실한 러시아군은 수도 키이우와 하르키우, 돈바스와 마리우폴, 오뎃사 항구 등지에서 우크라이나군에 내쫓기고 있으며, 격화되는 반전 시위로 푸틴을 비롯한 러시아 지도층의 갈등과 분열의 골도 깊어지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수백 년 동안 족쇄가 되어 온 페레야슬라프를 세계만방이 주시하는 가운데 다시 쓰기 위해서, 이 순간에도 피를 흘리며 크렘린궁을 두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