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 반영이 어우러진 풍경, 창녕 영산 만년교
봄꽃, 반영이 어우러진 풍경, 창녕 영산 만년교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2.03.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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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소박한 멋을 지닌 무지개 다리,
물에 비친 반영이 어우러진 보물 제564호
원교에서 만년교를 보면서. 장희자 기자

눈웃음 가득히
봄 햇살 담고
봄 이야기
봄 이야기
너무 하고 싶어
잎새도 달지 않고
달려나온
네 잎의 별꽃
개나리꽃
주체할수 없는 웃음을
길게도
늘어뜨렸구나
내가 가는 봄맞이 길
앞질러 가며
살아 피는 기쁨을
노래로 엮어 내는
샛노란 눈웃음 꽃

(개나리,  이해인)

만년교는 소박하다. 만년교(萬年橋)는 경남 창녕군 영산면 동리 433번지에 있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만년교’라 불렀다. 다리를 놓은 고을 원님의 공덕을 기리고자 ‘원다리’라고도 부른다. 남산(南山)인 함박산(咸朴山)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에 놓인 다리라고 하여 ‘남천교(南川橋)’라고도 한다. 

1780년(정조 4)에 창건된 홍예교(虹霓橋)이다. 홍예는 아래쪽이 위쪽보다 좁도록 다듬은 화강암을 반원형으로 쌓아, 다리의 무게가 옆으로 작용하게 한 구조물이다. 무지개다리나 석빙고의 천장을 만드는 기술로 사용되었다.

만년교 우측에 수양벚꽃이 바람에 날리며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장희자 기자.

1972년 3월 2일 대한민국 보물 제564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길이가 13.5m, 폭이 3m이다. 만년교가 있던 자리에는 본래 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 다리는 남쪽에서 영산고을로 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홍수 때마다 다리가 떠내려가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1780년(정조 4) 석공 백진기(白進己)가 처음 쌓았다. 김윤관(金允寬) 등이 현감(縣監)의 명을 받아 재원을 마련하고 공사를 감독하였다. 정축(丁丑)년에 큰 홍수가 발생하여 무너졌다.

만년교 무지개다리 물에 비친 반영이 곡선미를 더해 주고 있다, 장희자 기자

1892년(고종 29) 영산현감 신관조(申觀朝)가 석공 김내경(金乃敬)을 시켜 다시 쌓았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2005년 안전 문제가 제기되어 정밀 진단을 실시하였다. 결과는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2009년 9월부터 2010년 7월까지 8억8천여만 원을 들여 해체 보수하였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제120호인 석장 이의상씨가 맡아 추진하였다. 수차례 보수하는 과정에서 강돌을 불안정하게 쌓아 올린 것이 밝혀졌다.

홍살문과 비석이 보인다, 장희자 기자

만년교는 실개천 양쪽에 있는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삼았다. 가공한 화강석을 층층이 쌓아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틀었다. 홍예 위에는 비교적 네모나게 치석한 무사석을 쌓은 후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고르게 흙을 깔았다.

노면은 곡선을 그리며 양 끝을 길게 늘이고 있어 다리의 분위기가 아늑하다.  입구에는 홍살문을 세웠다. 만년교 주변에는 ‘남천석교서병명(南川石橋序幷銘)’이라 쓴 비석과 ‘만년교’라 쓴 비석 2기가 세워져 있다.

만년교 서편에서 남산호국공원내 6.25영산지구전적비가 언덕위에 서 있다. 장희자 기자

비석에는 1780년 당시 건립 목적, 시주자, 공사 감독자, 석공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비석중 하나는 13살 난 글씨 신동이 쓴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다리의 특징은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활용하였다. 

난간과 장식은 없으며 자연스럽게 휘어진 노면이 반원형의 홍예와 조화를 이룬다.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멋을 지닌 홍예교로서 순천 선암사 승선교(보물 제400호), 보성 벌교 홍교(보물 제304호), 여수 흥국사 홍교(보물 제563호) 등과 함께 조선 후기 홍예교의 축조기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만년교는 영산면내와 영산호국공원을 잇는 가교이다. 수양벚나무가 바람에 흔들려 그네를 타기도 한다.

만년교위에서 원교쪽을 보면서. 장희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