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모 육아 시대
조부모 육아 시대
  • 권오훈 기자
  • 승인 2022.03.21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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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출산율이 OECD 회원국 중 최하위를 기록한다. 결혼 적령기 청년들이 결혼을 미루고 임신 적령기 여성들이 아이 갖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경제적 문제도 있지만 육아의 어려움도 한몫한다.

여성들의 경력단절을 염려하여 육아를 맡아주는 조부모가 늘고 있다.

1. 이사하는 시니어들

 며칠 전에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서울에 살던 퇴직 동료였다. 대구로 이사를 왔다며 터줏대감인 내게 신고하는 전화라 했다. 그는 현역 시절 지역 본부장으로 대구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고향은 김천이고 거의 서울서만 근무하여 이곳에 연고는 없다. 이사한 연유를 물으니 손주를 돌봐주러 내려왔다고 한다. 아들 부부가 함께 지역 은행에 근무하는 사내커플이다. 아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집을 구했다고 한다.

또 다른 동료는 대전 토박이이고 학교도 직장생활도 그곳에서만 했다. 딸이 사위의 사업체가 있는 대구 소재 대학교로 직장을 옮겼다. 부부가 외손주를 돌봐주기 위해 딸 부부가 사는 아파트 같은 라인으로 집을 구해 이사를 왔다.

두 사람이 입행 동기라 만나서 점심을 먹는다며 함께 하자고 했다.

하필이면 그날 울산에 있는 친구의 초대로 태화강 변에 있는 파크골프장에서 라운딩이 약속되어 있었다. 부득이 다음 기회로 양해를 구했다.

2. 주중 돌보미와 캥거루 부모

사실은 울산에 있는 친구 부부도 주중에는 울산 아들네 집에서 손주들을 돌보다 주말에 대구에 있는 자기 집으로 다녀간다.

동네 이웃사촌인 J형님은 딸 부부가 울진군청에 근무한다. 그의 부인은 의성군청에 근무하는 미혼 아들 뒷바라지 겸 아르바이트를 위해 주중에는 의성의 아들 집에서 산다.

형님은 울진 딸네 집에서 손주 돌보미를 하다가 주말에야 대구 집으로 내려와 부부가 해후한다.

주위에는 상처한 후 서울에 사는 딸네 집으로 올라가 손주를 돌보는 선배, 부인이 만학도로 공부한다고 혼자서 서울 딸네 집에 가서 손주를 돌봐주는 선배도 있다.

우리 아파트에도 자식 부부를 같은 단지 내 옆 동이나 같은 라인에 이사하게 해서 손주를 돌봐주는 이웃이 여럿이다.

나도 손녀를 돌보러 가야 할 일이 가끔 있다. 잠자리 변화에 엄청 민감한 우리 부부는 이제껏 딸네 집에서 자본 적이 없다. 늦은 밤에라도 우리 집에 돌아와서 자야 한다. 배려심이 많은 딸과 사위는 2년의 육아를 위한 휴직 후에 부부가 교대로 출근할 때 데려다주고 퇴근할 때 데려오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선정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에도 방과 후 교실과 예능학원 스케줄을 빡빡하게 편성하며 어떻게든 우리에게 육아를 의지하지 않는다. 미안한 우리 부부는 그 대신 아이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수시로 만들어 시외버스 편으로 보내주고 주말에 찾아온 아이에게 전력투구하여 놀아준다.

3. 육친의 돌봄이 최적

 예전에 기혼 여직원에게서 들은 얘기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하면서 늘 마음이 쓰였다고 한다. 아이가 왠지 갈수록 기가 죽어가고 가구 모서리에 받혔다며 붉은 반점도 있더란다. 어느 날 아이의 고모가 지나는 길에 조카를 보러 어린이집에 들렀는데 보육교사가 어린아이를 쥐 잡듯 후리는 걸 목격하고 말았다. 피가 거꾸로 솟은 고모는 심하게 항의하고 그길로 조카를 데려왔다. 자기가 아이를 돌봐 줄 테니 어린이집 주는 돈만 달라고 하더란다.

지인의 딸은 엄마가 약국을 운영하니 어쩔 수 없이 베이비시터를 채용하여 집에서 아이를 돌보게 했다.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몰래 집안 곳곳에 CCTV를 설치했다고 한다.

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막상 육아는 힘이 든다. 오죽하면 2년의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데도 힘든 육아를 탈피하기 위해 조기 복직한 얌체 여직원도 있었다. 특히 나이 든 여성들에게는 아이 돌보는 일이 고통이다. 주위에 육아로 인한 질병으로 시달리는 여성 시니어들을 많이 봤다.

이래저래 따져 봐도 아이 엄마의 경력단절을 피하면서 마음 놓고 출근할 수 있는 육아 수단이 조부모의 돌봄만 한 게 없을 것이다. 사실 할아버지·할머니의 손주 사랑은 엄마·아빠를 능가할 정도이지 않은가.

김형경 작가는 ≪사람풍경≫이란 심리소설에서 우리 대부분은 세 살까지 형성된 인성을 중심으로 다섯 살까지 배운 관계 맺기 방법을 바탕으로 평생을 살아간다고 했다. 유아기가 아이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여러 연구 결과로도 증명되었다. 작가는 삼대가 함께 사는 가정이 아이의 유아기에 가장 바람직하다고 단언한다. 엄마·아빠의 진취적인 기운과 할아버지·할머니의 진중함을 고루 배운 아이는 반듯하고 활기 있게 자랄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도 '죽을 때 꼭 가져가야 할 한 가지'로 꼽을 만큼 우리나라의 전통 가족제도를 찬양했다. 70%가 넘는 아파트 거주율과 급속한 핵가족화로 사라진 게 못내 아쉽다.

출산율 저하를 걱정은 하면서도 자기 취미생활을 희생당할 수 없다며 나 몰라라 하는 조부모도 없지 않은 세태다. 자식이 사는 낯선 도시로 이사를 단행하거나 주말부부를 감수하면서까지 손주 육아를 맡아주는 조부모들의 사랑과 희생에 고개가 숙어진다. 한편으로는 애잔하면서도 든든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