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와도 같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바라는 것
쉼표와도 같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바라는 것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2.03.11 10: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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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오른손과 왼손을 나누지 말자. 젊은이와 노인을. 남자와 여자를. 아이와 어른을. 쥔 손과 빈 손을 가만히 들여다 보자.
그들 모두가 결국은 한 뿌리에서 뻗어난 다른 가지임을 기억하자. 혀에 박힌 가시는 뽑고 내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나의 귀를 먼저 열자.
과도한 무게가 실린 저울이 제 눈금을 찾아 가도록 잠시 기다려 주자.

 

 

 

3월 9일 오후 7시 30분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민심의 기류를 파악하는 출구조사를 거쳐 투표함이 개봉되기 시작했다. 지난 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내편 네편으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퍼붓던 조롱과 막말의 정치에 지쳐 속을 끓여 오던 터라 어느 때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개표 과정을 지켜보았다. 방송사들이 조사한 출구조사 결과 두 후보간의 차는 1%도 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종잇장 같은 미세한 차이였다.

출구조사의 불안한 출발을 거쳐 개표가 시작되자 파란막대는 키가 점점 커간다. 시간이 지나도 반전할 기미는 보이지 않고 마음은 이윽고 포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자정이 넘어 억지로 펼쳐두고 읽던 책을 덮고 자리로 가서 누웠다. 잠은 커녕 머릿속은 맑아지고 긴장으로 손가락 끝까지 뻣뻣해진다. 스마트폰을 열어 보지만 접속조차 쉽지 않다. 판세가 어떻게 흘러 가는지만 보자고 앉은 TV 앞에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빨갛고 파란 두 숫자의 미세한 움직임에 자리를 뜰 수가 없다. 조금만 더 벌어지면, 혹은 역전이 될까 조바심으로 지켜 보는데도 결과는 쉽게 가닥이 잡히지 않는다. 2시 반이면 3시면 당락이 확실해질까 기다려 보지만 결국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윤석열 후보의 이름앞에 ‘당선확실’의 문구가 뜨고 한쪽은 승복의 메시지를, 다른 한쪽은 당선 메시지를 내놓는다. 불확실성이 사라지고 47.78%와 48.64%라는 두 후보간 27만여 표 차이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제 20대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자가 되었다.

선거기간 내내 국정 운영의 큰 틀이나 방향성보다 꺼내들 수 있는 선심성 공약과 온갖 루머와 스캔들, 조롱과 모욕으로 상대방을 극한으로 밀어 붙이며 끓어 오르던 말들이 일시에 힘을 잃는다. 끓어 넘치던 냄비의 뚜껑을 열자 가라앉는 냄비속 맑은 육수처럼. 이재명 후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당원들과 지지자에 대한 감사와 오롯이 자신의 몫으로 받아 들인다는 승복의 메시지를 내놓는다. 이어 등장한 윤석열 당선자도 기쁨에 넘치는 승리자라기 보다는 ‘밤이 길었다’라는 말로 심경을 드러내며 모여든 지지자들에게 소박한 인사를 나누고, 침착하게 검은색 차량에 몸을 싣고 자리를 뜬다. 단지 0.8% 27만표 차이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며 상대를 이긴 대통령이 된 셈이니 그도 그럴 것이다.

승리를 거둔쪽이나 자리를 내어준 쪽 모두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긴 한숨 내뱉으며 모두가 끝났다는 텅 빈 마음.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달려온 후 무너지듯 다가오는 피로. 영혼을 탈탈 털어가는 상대편에 대한 분노. 그를 깨부수고 싶은 열망. 깃발을 고지에 꽂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 그 모든 것들이 밀려왔다 쓸려 나가는 파도처럼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비로소 평정심을 느꼈을지 모른다. 비등점을 향해 가열차게 끓어 올랐던 냄비의 내용물은 이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 순간 만나는 찰나의 고요. 머릿속 계산기가 멈추고, 진영의 논리가 입 다물고, 너를 벼랑끝으로 밀어 버리고 싶던 분노가 멈춘 자리. 허공과 같은 텅빈 자리. 이 짧은 고요의 순간이야말로 저울의 영점. 중심의 자리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쏟아버린 짧은 진공의 순간을 기억하자. 그리고 더 이상 오른손과 왼손을 나누지 말자. 젊은이와 노인을, 남자와 여자를, 아이와 어른을, 쥔손과 빈손을 가만히 들여다 보자. 그들 모두가 결국은 한 뿌리에서 뻗어난 다른 가지임을 기억하자. 혀에 박힌 가시를 뽑고, 내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나의 귀를 먼저 열자. 과도한 무게가 실린 저울이 제 눈금을 찾아 가도록 잠시 기다려 주자.

분노와 사생결단이 물러간 자리에 상식과 중도가 자리잡고 법과 공정함이 잣대가 될 때 더디지만 조용한 혁명이 시작될 것이다. 반쪽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가 되어, 비굴함이나 아니라 자긍심으로, 작지만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스스로 선택하고 당당한 힘을 가진 나라가 되어 뒤따라 오는 세대에게 선물같은 나라를 물려주자.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국민의 참뜻을 헤아려 주기를, 다양한 방면의 전문가들이 모여 방향성을 정하고 잘못된 부분은 뜯어고쳐 건강하고 밝은 미래의 디딤돌을 놓아 주기를 바란다. 5년후 대통령을 떠나 보낼 때, 그때 우리의 선택이 옳았다고 따뜻한 마음으로 떠나 보낼수 있는 행복한 국민이 되어 보기를 간절히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