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에이지 골든라이프] 헐크 이만수, 그의 포효는 끝나지 않았다
[골든에이지 골든라이프] 헐크 이만수, 그의 포효는 끝나지 않았다
  • 류영길 기자
  • 승인 2019.03.26 11:01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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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동안 받은 사랑, 이제 돌려드려야죠”
시골 학교로, 라오스로, “낮은 데로 갑니다”
선수 → 감독 → 재능기부... 열정의 인생3막
“형님, 누님, 힘내세요! 할 수 있는 일 많아요”

인터뷰에 친절히 응해 준 이만수 감독/ 사진: 조동래 기자
강연차 대구 범어도서관에 온 이만수 감독. 그는 가까이 하기에 부담스런 '잘난 사람'이 아니라 소탈하고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였다.      조동래 기자

불세출의 야구스타 이만수. 그는 잊혀져가는 사람일까?

22일 대구 수성 구립 범어도서관에서 열리는 ‘행복한 100세 경영 아카데미’에 그가 강사로 온다고 했다. 나는 야구에 그리 심취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를 꼭 만나고 싶었다. 시니어매일 독자들에게 그의 근황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강사 연락처로 전화를 하니 매니저가 받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만수 감독(엄밀히 말하면 ‘전 감독’이지만 편의상 ‘감독’이라 칭함)은 무척 바쁜 사람이라 했다. 미리 인터뷰 요청을 하다간 거절당하지나 않을까 하여 당일 길목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날이 왔다. 강연 반 시간 전인데도 범어도서관 지하 140석 강당에는 보조의자까지 이미 어르신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상대로 일찍 그가 나타났다. 합천 야로중학교에서 3일간의 재능기부를 막 끝내고 급히 오는 길이라며 등번호 22번의 라오J브라더스 유니폼 위에 짧은 파커를 입고 있었다.

“대구에 오면 가슴이 설렙니다. 운동했던 장소도 생각이 나고... 미국에 가기 전까지 범어동 경남타운에 살았었죠. 지금 여기가 우리 동넵니다” 그는 미국에서 귀국 후 인천에 둥지를 틀었다. 그래서 대구 땅을 밟을 땐 감회가 새롭다. 강연이 끝나면 바로 떠나야 한다기에 강연 전 30분간의 막간 인터뷰를 청했다. 감사하게도 그는 모든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 목청껏 외쳤던 그 이름 “만수”

1980년대 야구장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이름은 ‘만수’였다. ‘이만수’가 아니라 그냥 ‘만수’였다. 엄마 아빠 손잡고 온 어린아이들도 덩달아 “만수야, 만수야!”를 외쳤다. 마음 좋은 이만수 선수는 늘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통쾌한 홈런과 함께 특유의 헐크 세리머니로 화답했다.

특급 포수이자 초대형 타자 이만수. 그는 대구 중앙초 대구중 대구상고를 거쳐 서울(한양대)로 진출했다. 그러다가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마음의 고향인 대구로 다시 돌아왔다. 삼성 라이온스에 몸담은 그는 단 한 번도 타 구단으로 이적한 적이 없었다. 그는 1970년대 가장 인기를 누렸던 학생 야구의 핵심 선수였고, 청소년 국가대표와 성인 국가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1982년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역사적 첫 안타, 첫 타점, 첫 홈런을 기록했다. 이어서 MVP, 타격왕, 홈런왕, 타점왕을 휩쓸었다. 특히 1984년 기록한 타격 3관왕(타율.홈런.타점)은 23년 동안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대기록이었다.

선수 생활을 끝내고 2000년 미국으로 진출, 메이저리그 코치가 되었고 2005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견인, 월드시리즈 반지를 낀 최초의 한국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귀국하여 프로야구 SK 와이번스의 지휘봉을 잡았고 3년간의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그는 야구 올스타 팬 투표 1위에 네 번이나 올랐으며 선수 생활을 마친 후에도 최고의 올드 스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범어도서관 로비에서 포즈 취한 이만수 감독. 단단한 몸매가 현역시절과 다름없어 보인다. / 사진: 조동래 기자
범어도서관 로비에서 포즈 취한 이만수 감독. 단단한 몸매가 현역시절과 다름없어 보인다.  조동래 기자

◆ 더 큰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독 시절 그는 수많은 악플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보다 그의 아내의 고통이 더 컸다. 감독 퇴임 후 부인 이신화 씨를 위로하기 위해 동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신나는 여행 계획을 깜짝 발표하려던 순간, 아내의 입에서 벼락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왜 당신은 리더로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 그때야 그는 퇴임 후엔 라오스로 가겠다고 공언했던 오래전의 일이 떠올랐다.

여행을 취소하고 퇴임 열흘 만에 라오스로 향했다. 동남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사회주의 국가 라오스. “이만수가 거기 가서 무얼 한단 말인가?” 사방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진심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라오스의 아이들도 처음에는 그를 경계했다. 물이 귀한 나라 굶주린 이들에게 물을 주고 빵을 주겠다 하니 순식간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밥 주고 잠재워가며 키운 아이들로 팀을 꾸렸다. 이것이 라오스 최초의 야구팀이자 유일한 팀이요 라오스 국가대표팀인 ‘라오J브라더스’이다.

이 팀을 이끌고 지난해 8월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도 참가하여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최근에는 여자 야구 국가대표였던 황세원 선수를 여자야구 전담 지도자로 파견, 라오스 야구에 활기를 더하고 있다.

라오스의 아이들에게 마음이 꽂힌 지 어언 5년, 세상 사람들이 놀라기 시작했다. 이만수를 보는 사람들의 눈이 달라졌다. 이제 아무도 그를 조롱할 수 없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벵츄로 WBSC (세계야구 소프트볼 협회) 사무총장이 라오스를 방문했다. 라오스의 놀라운 변화를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 '사랑에 빚진 자'로... 재능도 물질도 되돌려 주다

라오스에 야구의 씨를 뿌리면서 국내에서도 재능기부를 시작했다. 좀 더 체계적인 활동을 펴기 위해 2016년 비영리 사단법인 헐크파운데이션을 창립했다. 헐크 파운데이션에 재능기부 요청이 들어오면 두메산골도 마다않고 달려갔다. 작년 한 해 전국 방방곡곡 찾아간 야구부가 52곳이나 된다. 올해 들어서도 이미 10군데를 다녀왔다.

기부 활동은 몸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2017년부터 약 2년 동안 27대의 피칭 머신(타격 연습을 할 때에 사람을 대신해서 타자에게 공을 던져주는 기계)을 국내 유소년 야구팀과 관련 단체에 후원했다. 2017년 말에는 전국 고교 선수들을 대상으로 ‘이만수 포수상’과 ‘이만수 홈런상’을 만들어 후배들을 격려하고 있다.

이 감독이 이렇게 기부 활동에 헌신적인 이유는 단 하나다. “지난 50년 동안 과분한 사랑을 받았어요. 그래서 꼭 그 사랑을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 지금이 가장 행복한 이유... 낮은 데로 향한 가슴 설레는 순례의 길

“월급 없이 살아온 지난 5년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만수 감독은 지금이 자기 인생의 전성기라고 한다. 선수로도 지도자로도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던 그가, 사실상 백수로 살아가는 현재를 인생의 절정기라 함은 왜일까?

헐크 파운데이션 이사장, 한국야구위원회(KBO) 부위원장, 라오스 야구협회 부회장 등 화려한 직함 때문에 그러는 걸까? 그는 단호히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오늘도 낮은 데로 향하고 있다. 낮은 데로 향하여 낮은 자세로 행하니 행복이 찾아오더라는 것이다. 라오스로 그리고 국내 오지로 내려가면 낯선 아이들이 “감독님” 하며 달려와 품에 안긴다. 그들의 온기가 가슴에 닿을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사랑을 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이만수의 고백이다.

한 곳에서 2~3일 지도해야 하는데, 이미 방문 요청을 받아놓은 곳이 30군데가 넘는다. 이제부터는 시골 오지 지역을 우선으로 리틀 야구단, 초·중학교 야구단, 여자 야구단, 사회인 야구단 등을 찾아가기로 했다. “잘 되는 곳엔 그들의 선배들이 자주 갑니다. 그러나 외진 곳엔 아무도 찾아주지 않습니다.” 폐교 직전이었던 학교에 야구부를 만들었더니 다시 학교가 살아났다. 그의 마음은 늘 그런 곳으로 향하고 있다.

인천에서 라오스로, 라오스에서 인천으로, 그리고 시골 학교로, 또다시 인천의 집으로... 그의 동선은 대부분 재능 기부를 위한 노정이다. 힘들고 외로울지라도 가슴 설레는 순례의 길이다.

많은 야구팬들은 그의 프로야구 복귀를 바라고 있다. 고향의 팬들은 이만수 감독이 삼성으로 돌아오기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감독은 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이 조금도 없다. "프로야구 현장은 제가 없어도 잘 돌아갑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은 아무나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야구인이다. 그 누구보다도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짜릿한 승부의 세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다.

청중들에게 타격시범을 보여주고 있는 이만수 감독. 그의 타법은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해, 소속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월드시리즈 우숭을 견인했다. / 사진: 조동래 기자
청중들에게 타격시범을 보여주고 있는 이만수 감독. 그의 타법은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해, 소속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견인했다.  조동래 기자

◆ 가장 고마운 사람은 언제나 “아내”

그는 1년에 약 8개월을 집 밖에서 보내고 있다. “다행히 아내가 허락해줬어요. 자기가 숟가락 못 들 때까지만 하라는 말을 하면서 아직까지는 숟가락을 들 수 있다고 하네요”라며 웃었다. 처자식 두고 봉사활동을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기에 아무나 이런 일에 선뜻 나설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 바로 그의 아내인 것이다.

SK 구단에서 물러난 후 3년간 돌아다니며 사재 4억 원을 털어 넣었다. 그는 “집에서 쫓겨나지 않은 게 기적”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내는 자기 인생에 굴러들어온 최고의 복덩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행운아 이만수. “지금껏 사랑도 많이 받았고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 평생 원하는 걸 다 하라고 아내가 말했어요” 이런 아내가 한없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기만 하다.

◆ 야구전도사에서 행복전도사로...“Never ever give up"

인터뷰가 끝난 후 강연장 보조의자에 앉아 그의 강연을 엿들었다. 특유의 미소를 그대로 간직한 채 고향 어르신들 앞에 나타난 왕년의 스타 이만수 강사. 잔잔한 그의 목소리가 청중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간간이 목소리를 높일 때는 그라운드에서처럼 쩌렁쩌렁 울렸다. 한 시간 반에 걸쳐 ‘은퇴가 없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그의 강연의 일관된 주제는 “포기하지 마세요, 절대로!(Never ever give up)”였다. 그는 왜 ‘포기하지 마라’고 외치는 걸까?

다른 사람보다 늦게 야구를 시작한 그는 늘 후보 신세를 면치 못했다. 14세 중학생 이만수는 하루 4시간 이상 자지 않고 연습에 몰두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10년 후엔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가 되겠노라고. 그리고 반드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겠노라고. 그는 3년 만에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가 되었고 30년 후엔 지도자로서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도 이루었다.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을까? 이역만리 낯선 미국 땅에서 덩치 큰 사람들로부터 따돌림과 업신여김을 받았을 땐 모든 소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때 샤워기를 틀어놓고 정말 많이도 울었습니다. 작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그만큼은 울지 않았는데...”

그도 포기하고 싶었다. 보따리를 싸 들고 돌아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언제나 새로운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고난의 끝에 찾아오는 놀라운 기쁨을 경험했다.

그의 강연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폭소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어떤 이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야구 홈런을 날려주던 그가 행복 홈런을 날려준 것이다. 그라운드에서 관중들로 하여금 환호와 탄식을 자아내게 했던 그가 강연장의 청중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했다.

감독에서 퇴임하자 그는 눈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이제 뭐 하며 살아야 하나?' 문득 40년 넘도록 써온 일기장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속에서 야구로 할 수 있는 일을 무려 서른다섯 가지나 찾아냈다는 이만수 감독.

“100세 시대잖아요. 많이 남아 있어요. 형님, 누님, 기죽지 마세요. 저는 야구만 했지만 형님 누님들은 공부하셨잖아요. 저보다 더 똑똑하시잖아요. 제가 서른다섯 가지면 형님 누님들은 오십 가지는 돼야죠. 할 일이 많습니다. 제발 집에만 계시지 마십시오. ”

강당을 가득 메운 인생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좋은 자리는 생각하지 마세요. 도회지 화려한 데는 안 써 줍니다. 버스 타고 30분만 나가면 여러분을 기다리는 사람 많아요. 저는 야구를 갖고 시골로 갑니다.”

강연이 끝나고 그는 사인을 요청하는 시니어들에게 일일이 “Never ever give up"이라고 적어 주었다. 높은 곳이 아니더라도 좋다. 끝까지 할 일을 찾아 살아가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삶이라는 뜻이다.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만수 감독의 강연. / 사진: 조동래 기자
"Never ever give up!"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만수 감독의 강연.  조동래 기자

◆ 이만수의 꿈은 현재진행형이다

야구인 이만수의 꿈은 무엇일까? 그의 필생의 소원은 라오스에 야구장을 지어서 세계대회를 유치하는 것이다. “라오스는 겨울철 비가 오지 않고 습하지도 않아 야구하기가 참 좋은 곳이에요. 라오스에 야구장을 짓는다면 고국의 어린 선수들이 전지훈련도 갈 수 있어 좋아요.” 그는 자신의 꿈이 꼭 이루어져 라오스에 야구를 통한 새로운 한류가 일어나기를 갈망하고 있다.

신실한 크리스천인 그에게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 성경 말씀이 뭐냐고 물었다. 요즘은 에스더 4장 14절 말씀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그렇다. 그는 그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남에게 인심을 쓰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섭리를 받아들여 사명감으로 살아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야구에 대한 그의 사랑이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된 것이다. 그래서 어린 학생들이 야구선수로만 훌륭하게 자랄 것이 아니라 야구를 통하여 만들어갈 더 좋은 세상을 꿈꾸길 원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성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인간 이만수. 그도 어느덧 이순을 넘겼다. 세 살배기 손자를 둔 할아버지가 되었다. “만수야, 한방 터자 도오~~” 라고 외치던 아이들도 이제 50줄에 들어섰다.

그러나 100세 시대 우리의 삶은 9회말까지다. 이만수 감독의 인생은 아직 6회초다. 남은 생애 그가 또 몇 개의 홈런을 더 칠지 아무도 모른다. 헐크의 포효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