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김삼웅 '우당 이회영 평전'
[장서 산책] 김삼웅 '우당 이회영 평전'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2.02.2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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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운동가

저자 김삼웅은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지금의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 등 이 분야의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1. 봉건질서를 부정하고 자유사상을 키우다

이회영(李會榮)은 1867년 4월 21일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유승은 이조판서와 의정부 참찬을 지냈으며 어머니 정 씨는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딸이다.

이회영은 6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장남 건영, 차남 석영, 삼남 철영이 있고, 아래로는 다섯째 시영과 막내 호영이 있다. 우당 6형제의 우애는 남달라서 이웃의 모범이 되었다.

이회영은 19살 무렵부터 이상설·여준 등과 만나 교류하고, 신흥사에서 이들과 함께 합숙하면서 수학·역사·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다. 명문가의 자제가 과거 공부에 전념하지 않고 신학문을 공부하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또한 이회영은 이상설 등 일군의 의식청년과 함께 성리학의 적폐에서 벗어나 점차 기울어가는 국가의 명운을 살리기 위해 양명학을 탐구하고 이를 실천이념으로 수용했다.

이회영은 자신의 일관된 정견은 자유사상이라 밝힌 적이 있다. “나는 본래 벼슬을 싫어했다. 그 때문에 나는 독립한국을 반드시 사민(만인)이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따라서 공평하게 다 같이 행복을 누리며 자유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 나의 독립관이며 정치 이상”이라고 피력한 데서 그의 확고한 자유평등사상을 엿볼 수 있다.(22~35쪽)

2. 청년 구국민족운동가로 성장하다

1904년, 이회영은 전덕기, 주시경, 이동녕 등과 함께 서울 상동교회(감리교) 부설로 설립된 민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 활동을 시작하면서 청년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1907년 4월, 상동청년학원 학감으로 근무하면서 이 학교 교사 전덕기, 김진호, 이용태, 이동녕 등과 함께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발기했다. 신채호, 노백린, 안창호, 이동휘, 양기탁 등 쟁쟁한 독립지사들이 참여한 신민회는 정치·교육·문화·경제 등 각 방면을 진흥시켜 국력을 기르는 데 목적을 두었다.

1885년(19살) 달성 서씨와 결혼한 이회영은 1907년 1월에 병으로 아내를 잃었다. 그리고 1908년 10월 20일에 이은숙과 재혼했다. 이회영은 3남매가 딸린 중년 홀아비이고 신부는 19살의 명문 사대부가 처녀였다. 이은숙은 결혼 2년여 만에 남편을 따라 60여 명의 일가와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 일족을 내조하면서 고단한 생애를 살았다.(42~58쪽)

3. 일가 60여 명과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오르다

1910년 12월 어느 날, 이회영은 형제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망국의 상황과 망명의 당위를 통렬하게 설파했다. 이회영의 비장한 발언에 형제들은 모두 응낙하고, 가산과 전답을 팔아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이회영 일가가 전 재산을 팔아 만든 돈이 약 40만 원이었다. 당시 쌀 한 섬이 3원 정도였으니, 40만 원이면 아주 큰돈이다. 현재의 쌀값으로 환산하면 600억 원, 황소로는 1만 3,000두 값이다.

1910년 12월 하순, 이회영 일가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서울을 떠났다.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고 이듬해 2월 초순에 쩌우자가(鄒之街)에 도착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쩌우자가보다 더 지형이 험한 하니허(哈泥河)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회영은 일가의 정착지가 마련되면서 ‘망명 과업’을 서둘렀다. 그래서 먼저 시작한 것이 경학사(耕學社) 설립이었다. 경학사는 이름 그대로 낮에는 농사를 지어 주민들의 생계를 도모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곳이었다. 다만, ‘밤의 공부’ 중에는 야간 보행을 비롯해 군사훈련이 따랐다는 점이 특별했다.

이회영과 민족지도자들은 경학사를 힘겹게 운영하면서도 경학사 내부에 신흥강습소를 설립해 동포 청년들의 군사교육을 서둘렀다. 경학사가 민단 성격을 띤 자치기관이었다면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전 단계로 설립된 신흥강습소는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교육기관이었다.(71~89쪽)

4. 독립군 양성소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다

신흥강습소는 1913년에 신흥중학으로, 3·1 혁명 뒤인 1919년에 다시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실제로 신흥강습소 시대부터 무관학교로서 군사교육과 군사훈련을 시켰다.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 일가를 비롯한 뭇 지사들과 한인동포들의 피땀으로 지어졌다.

1912년 7월 20일에 동포 100여 명과 중국인 수십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이 조촐하게 치러졌다. 교실 18개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산허리를 따라 줄지어 있었고, 학년별로 널찍한 강당과 교무실, 내무반에는 기능별로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다. 훈련용 총기를 진열하는 총가(銃架)도 낭하에 비치되었다.

신흥무관학교에는 본과와 특별과가 있었다. 본과는 4년제 중학과정이고, 특별과는 6개월과 3개월 속성의 무관 양성과정이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과 중국 관내에서 항일독립운동의 중핵이 되었다.(93~120쪽)

5. 고종 황제의 망명을 추진하다

1918년 이회영은 고종 황제를 중국으로 망명시켜 그를 구심으로 망명정부를 세워 일제와 싸우면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회영은 사돈 조정구(고종의 매부이며 아들 규학의 장인)의 아들 조남익과 내시 이교영과 의논하고 고종망명계획을 추진하였다. 고종의 지시로 민영달에게서 5만 원을 받아 베이징에 고종의 거처를 마련했으나 고종이 서거하는 바람에 좌절되었다. 고종의 망명계획을 눈치챈 친일 주구들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설이 있다.(145~150쪽)

6. 아나키즘에서 독립운동과 미래사회의 길을 찾다

1910~1920년대를 전후하여 베이징에 모인 한국 독립운동가 중에는 아나키즘에 경도된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이회영, 신채호,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정화암 등 대부분 지적(知的)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이다.

독립운동가들은 항일투쟁의 이데올로기를 아나키즘에서 찾았고, 궁극적으로는 해방된 조국의 미래상으로 강제·강권·독점이 없는 민주사회 건설을 꿈꾸었다. 이것은 곧 이회영과 신채호, 유자명 등이 그리는 이상사회의 종착지이기도 했다.

이회영은 1922년에 베이징과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는 작업을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만들어진 것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다. 통의부는 군사조직과 자치행정기구를 갖추었으며 군사조직으로는 5개 중대와 유격대·헌병대를 두고 이천민이 사령관직을 맡았으며, 병력은 약 50명이었다. 통의부는 산하에 의용군을 편성하여, 일제 군경의 관서를 습격하여 각종 무기를 노획하거나 러시아를 통해 무기를 매입하여 무장하고 관내 한·중 친일파를 처단했다.(179~199쪽)

7. 의열단에 바친 열정 그리고 이상촌의 꿈

의열단은 1919년 11월 10일 만주 지린성 파호문 밖 중국인 판씨(潘氏) 집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김원봉 등 13명에 의해 창단되었다. 의열단은 조직적인 무장투쟁과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일제 식민통치를 끝내고 민족이 해방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만주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국내에서는 소수정예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작탄투쟁(炸彈鬪爭)을 결행했다.

1920년대 초기 의열단의 폭렬투쟁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많은 애국청년들이 의열단에 속속 가입하여 육탄혈전을 벌였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1919년 6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많은 의열 동지들을 만나고 폭탄제조법 등 군사기술을 익혔다. 의열단의 산파역을 맡은 황상규는 만주와 국내 청년들을 모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켰다. 의열단의 폭력적인 작탄투쟁은 이렇듯 이회영의 신흥무관학교에서 연원한다.

아나키스트 이회영은 1923년 9월에 이상농촌인 량타오촌(洋濤村) 건설을 계획했다. 이 계획은 이정규가 중국인 아나키스트 천웨이치(陳偉器)로부터 제안을 받아 이회영을 방문하여 ‘지도’를 요청함으로써 추진되었다. 50호에 이르는 한국 농민을 개성과 개풍 등지에서 이주시키기로 하는 등 이듬해 봄을 기하여 이 계획을 실행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빗나가고 말았다. 불행히도 후난성에서 내분이 일어나 농지를 제공하기로 약속한 중국인 저우(周)의 일족이 쫓겨나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중지하고 뒷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205~232쪽)

8. 아내를 서울로 보내고 텐진에서의 나날

이은숙은 1925년 7월 하순에 생활비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속히 다녀온다며 서로를 걱정하며 헤어진 이 길이 영원한 이별의 길이 되었다. 아내가 조국으로 떠난 뒤 이회영의 생계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동안 톈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둘째 형 이석영 부부와 아들이 더 이상 생계를 의탁할 길이 없어 베이징으로 올라와 이회영의 집에 함께 기거하기에 이르렀다. 만석꾼이었던 이회영은 끼니도 이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쌀이 없어서 밥을 못 지을 만큼 처참하고 슬픈 생활이었다.(286~288쪽)

9. ‘동방연맹’ 결성 그리고 풍찬노숙의 일월

1928년 5월, 상하이에 모인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류기석 등은 재중국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연맹)을 결성했다. 연맹은 이 기구를 국제적인 연대 기구로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준비 과정을 거쳐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동방연맹)이 조직되었다. 조선, 중국, 일본, 타이완, 베트남, 인도, 필리핀 등 7개국 대표 120명이 모여 동방연맹을 결성했는데, 한국의 이회영, 신채호, 이필현 등을 비롯하여 중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리스청과 루쉰 등이 참석했다.(313~314쪽)

10. 항일구국연맹과 흑색공포단을 지도하다

일본과 중국의 전면전이 내다보이면서 상하이에 머물던 이회영과 유자명 그리고 북만주에서 내려온 정현섭(정화암), 이강훈, 백정기 등 아나키스트들은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남화연맹)을 결성하고 항일전열을 재정비했다.

남화연맹은 이회영을 의장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회영이 끝내 사양하여 유자명을 의장으로 선임하고, 선전과 행동을 병행하면서 급변하는 대륙의 정세에 대응하여 폭력투쟁을 준비했다.

이 무렵 중국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이 이회영 등에게 항일공동전선을 제의해왔다. 이에 따라 한·중·일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은 1931년 10월 말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항일전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회영은 항일 직접행동을 위하여 항일구국연맹 요원들과 ‘남화연맹’의 핵심인 흑색공포단을 백정기의 주거지에서 비밀리에 조직했다. 국제테러단인 흑색공포단은 ‘남화연맹’ 구성원들 외에 일본과 타이완, 중국 사람도 참여한 결사조직이었다. 흑색공포단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그리고 톈진에서 일본 기선과 일본 영사관의 폭파 의거 등을 감행했다. 흑색공포단의 일련의 투쟁으로 일본 관헌들에게 흑색공포단은 의열단과 보합단 등에 이어 가장 두려운 단체로 인식되었다.(371~377쪽)

11. 마지막 불꽃을 사르러 가는 길에 순국하다

이회영은 생애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면서 ‘죽을 곳’을 찾았다. 그것은 만주로 올라가서 그사이 와해되다시피 한 독립운동 조직을 살리고, 이를 통해 일제 요인과 기관을 처단·폭파시키는 일이었다.

1932년 11월 초, 이회영은 홀로 상하이를 떠났다. 황푸강에서 배를 타고 다롄(大連)으로 출발했다. 이회영은 여비를 아끼느라 선박의 제일 밑바닥인 4등 선실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멀어져가는 상하이의 불빛을 바라보며 만주에서 도모할 계획에 한껏 꿈이 부풀었다. 하지만 이후 이회영의 행적은 어디에서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이회영은 11월 13일 다롄 수상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1월 17일 뤼순감옥에서 교형(絞刑)을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384~407쪽)

 

우당(友堂) 이회영을 생각하면 으레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e 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떠올리게 된다.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이회영은 모든 기득권을 초개처럼 버린 채 일가 6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함으로써, 일찍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이회영 6형제 중에서 해방 뒤 다섯째 이시영만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오고, 이회영은 안중근과 신채호가 처형되거나 옥사한 뤼순감옥에서 극심한 고문으로 숨졌다. 그리고 형제·가족·일가 상당수가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숨졌다. 이들 만석꾼 부자 후손 중에는 중국에서 굶어 죽은 이까지 있었다. 우당의 아들 규창은 친일파 척결에 나섰다가 구속되어 11년 반 만에 8·15 해방을 맞아 감옥에서 나왔다.(11쪽)

이회영은 많은 독립운동 기관과 단체를 조직하고도 앞에 나서지 않았고, 많은 공을 세우고도 업적을 동지 후진들에게 돌림으로써 아나키스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회영은 해외 독립지사들의 따뜻한 안식처였고, 독립운동가들의 영원한 벗이었다.

공자가 ‘시경(詩經)’의 시 300편을 요약하면서 찾아낸 말이 ‘사무사(思無邪,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다)’였듯이, 우당 선생의 생각과 행동에는 사악함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우당의 늠연(凜然)한 기상, 고절한 인품과 지절(志節), 해활천공(海濶天空)의 도량, 그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과 실천은 모든 지도자의 사표가 되고도 남는다.(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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