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49)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49)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02.03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달빛을 품어 안은 물레방아의 돌확이 헌털뱅이냄비모양 밤새 찌그럭거린다
조목조목 비결을 묻고는 시도 때도 없이 영천댁을 불러 앉혔다
질투심에 눈이 먼 서방에 의해 눈알이 파지고 결국 죽음을 맞았다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여우같은 여자랑은 살아도 곰 같은 여자랑은 못산다는 말이 있듯, 낮에는 요조숙녀로 살더라도 밤에는 요부가 되어 남편을 홀려야 아기가 잘 생긴다는 말에 따라 영천댁은 코맹맹이 소리를 ‘응응’거려가며 영천양반의 품속에 한정 없이 몸을 묻었다. 전에 없이 양팔로 등과 허리를 껴안았다. 영천양반을 깊숙이 품어 달콤한 꿈길을 달렸다. 심연 속으로 가라앉듯 평안하게 단꿈에 젖었다. 달달하게 기울인 화주가 온 몸을 감돌아 용틀임으로 휘몰아친다. 초야의 밤처럼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듯 붕붕 뜬 기분으로 얼마나 잤을까? 문득 허리를 감아오는 손길이 따사롭게 느껴진다.

몇 시나 되었을까? 확인하고 싶어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 눈앞의 손가락조차 보이질 않는데 어디서 시계를 찾고 시간을 본단 말인가? 누운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썩, 기다렸다는 듯 양팔을 활짝 벌려 품안으로 영천양반을 받아들였다. 목덜미에서 풍기는 찌든 땀 냄새조차 샤프란 향기로 녹아드는 밤이다. 사각거리는 이불깃 스치는 소리가 잠들지 않은 밤 인양 싶은데 새벽으로 치닫는 시계불알만 ‘뚝딱~!똑딱!’밤을 센다. 동구 밖에서 달빛을 품어 안은 물레방아의 돌확이 헌털뱅이냄비모양 밤새 찌그럭거린다. 해시인지, 자시인지, 축시인지 까맣게 잊었다.

시어머니의 시간 이야기에 ‘예!’라고 다소곳하게 대답은 했지만 자신은 없었었다. 괜히 가슴이 뜨끔하고 죄송스럽다. 그런 사소한 실수로 인해 그간 심혈을 기울여 공을 들인 일을 그르칠까 두려웠다. 이는 시어머니가 원하는 이상으로 영천댁도 아기가 갖고 싶었다. 무더운 여름날, 밤을 빌어 동네 아낙네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은 시냇가에서 목물을 할 때면 달빛에 허옇게 들어 난 영천댁의 가슴을 본 김천댁이

“워~메! 저 영천댁 뽀얀 젖 티 좀 보소! 암소젖만 한 게 탱글탱글 튼실하기도 하네! 낭중 아기는 좋겠다.”하고 부러워할 때면 성주댁은

“아니지 장가 한번 잘 든 영천양반이 삼팔장땡을 잡은 게지! 어디 그게 영천양반 꺼지 세상에도 없는 애기 거라던!”하고 놀러 온다. 그럴 때면 괜히 부끄럽고 무안에 젖어
“왜 가만있는 남의 젖통은 갖고 그래요! 다들 허옇고 둥글둥글한 게 만만찬구만!”하면서도 괜한 기분에 양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넣어 슬며시 젖을 모아보는 영천댁이었다. 그럴 때면

“저런 저 영천댁 하는 꼬락서니 좀 보소! 이쁘다. 이쁘다 칸께~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오른다고...! 저 방정맞은 본새 하고는!”하고 손가락질 끝에 배꼽을 잡아 자지러진다.

아니게 아니라 가을철 초가지붕 위서 뒹굴뒹굴, 달빛에 젖어 허벅지고도 허옇게 부서지는 둥그런 박 같다며 영천댁의 가슴을 두고 동네 아낙들은 너 나 없이 탐난다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아기가 없는 마당에 영천댁의 가슴은 화중지병이나 다름없었다. 아기를 낳아야 젖이 돌든지 넘쳐도 넘칠게 아닌가? 이래저래 거추장스럽게 폼만 좋아 빛 좋은 개살구다. 곁으로는 태평을 가장했지만 속으로는 울고 싶은 심정이다. 가슴만 예쁘고 튼실하면 어디다 쓸 것이냐며 하늘을 두고 원망이다. 또래의 아낙네들이 남정네의 눈길을 피해 돌아앉아

“보긴 어딜 보려고 그래요! 엉큼하게 시리! 눈은 저리로 하소!”하고 하얗게 눈을 흘긴 뒤 가슴팍을 풀어 헤쳐 아이에게 젖은 물리고, 고만고만한 아이의 손을 잡고 다정스럽게 삽짝을 나서는 모습을 일별할 때는 가슴이 찌르르하여 아렸다.

처녀 적 영천댁은 순진하게도 결혼만 하면 절로 아기가 생기는 줄로만 알았다. 손목만 잡아도 아기가 생긴다는 말은 진즉에 거짓말인 줄 알았지만 이렇게 애면글면 애를 달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 2~3년은 그럴 수도 있다 생각했다. 시어머니도 너무 마음 쓰지 말아 라! 안달하는 마음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말했다. 마음을 편안하게 쓰는 것이 임신에 좋다고 어깨를 두드려가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런데 5년을 넘자 모든 상황이 급변했다. 시어머니는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어느 시점을 지나자 슬슬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지긋할 것처럼 척 위장했던 마음이 기다리다 못해 폭발하는 형국이다. 속수무책으로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많은 없다는 것이 시어머니가 내린 결론이었다. 이러다가 진짜로 대가 끊기는가 싶었는지 한번 폭발한 마음은 봇물 터지듯 걷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사방으로 수소문이다. 스스로 내린 결론에 따라 시어머니는 뒤늦게 애기를 낳았다는 산모를 찾아 나서고 있었다. 멀고 가깝고를 떠나 기어이 찾아서는 조목조목 비결을 묻고는 시도 때도 없이 영천댁을 불러 앉혔다.

“애~ 아가야 그 집의 늙은 새댁은 이래저래 해서 아기가 생겼다 하더라!”며 잠은 어느 쪽으로, 걸음걸이는 어떻게, 음식을 어떤 것으로 하며 일일이 간섭하고 들었다. 처음에는 심적으로 부담도 컸고 잔소리로 여겨 성가시다 싶었다. 말로 표현은 못했지만 시어머니의 애기 타령만 없으면 살 것 같았다.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가 아닌, 팔자에도 없는 애기 타령의 시집살이는 사는 것만 같았다. 한데 7년을 지나면서부터 영천댁의 조바심은 시어머니를 넘어서고 있었다. 과거의 시어머니처럼 영천댁은 자발적으로 찾아다니면서 묻고는 흉내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애달픈 시간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영천댁의 장롱 속에는 아들을 낳았다는 여인네의 속옷과 각종 부적나부랭이, 기물들로 빈틈을 채워 차곡차곡 매워간다. 아기만 낳았다면 죄다 쓸데없는 잡동사니의 것들로 넘쳐나는 장롱 앞에 앉아 한숨 짖는 영천댁은 지레 늙어가는 기분이다. 며느리로써, 부인으로써의 삶이 아니라 어머니로써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만큼 영천댁의 눈가로는 생과부의 베갯머리처럼 밤이면 밤마다 눈물로 얼룩이 진다. 영천댁의 안달하는 마음은 동네의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고샅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불러다 앉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은 데서 마음이 대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손자, 손자하고 손자를 노래하는 시어머니가 언제까지 참아 줄지는 영천댁으로서도 자신이 없었다. 영천댁이 이대로 석녀(石女: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로 일관을 한다면 시어머니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릴 것이다. 이는 시어머니의 대를 이을 손자 타령의 성품으로 보아 눈으로 보는 듯 명징했고 그 결정은 영천댁에게 있어서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다. 슬하에 자식이 없는데 아무리 부부 금실이 좋은들 무엇 하랴! 첨상이의, 씨받이는 정해진 수순이다. 첨상이나 씨받이를 들이는 지경이면 영천댁은 여자란 미련을 버려야 하는 치명타에 쐐기를 박는 꼴이라도 어쩔 수 없다. 첩상이나 씨받이가 갖는 젊은 여자의 보드라운 살결에 한번 빠져버린 남정네는 찌든 김치 냄새에 된장 냄새나 풍기는 본 부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이 세상 이치다. 나아가 베갯머리에서의 속살거림으로 하루가 다르게 사이는 벌어져 냉랭해질 것이다. 결국 찬 밥 신세로 끈 떨어진 가오리연 같은 신세로 전락하여 허공을 움켜쥐고는 고독과 외로움에 젖는 몸부림은 시간문제다. 그렇게 해서라도 해결이 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영천양반의 생식기에 문제가 있다고 결론이 내려지면 씨내리조차 마다할 시어머니가 아니다. 집안의 결정이라며 영천댁이 씨내리를 나서는 지경이라면 갈 때까지 갔다고 여기면 된다. 이승에 있어서 영천댁의 행복은 이미 남 이야기다. 여성들의 질투심은 이성을 동반하지만 남성의 질투는 감성을 동반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씨내리로 나섰던 여인은 질투심에 눈이 먼 서방에 의해 눈알이 파지고 결국 죽음을 맞았다. 시어머니도 그것만은 막아보자는 심사에서 극성 아닌 극성을 부리고 있다. 그렇게 비참한 신세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시어머니의 말을 좇아 어떻게든 이참에 아기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 영천댁의 일구월심이다.

그길 만이 이집에서 밥술이나마 뜨고 따뜻한 아랫목으로 편안케 몸을 뉘는 질긴 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든든한 버팀목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시집 귀신으로 온전한 몸뚱이로 선산에 묻히리라 여겼다. 그러다가 씨앗 싸움도 제대로 못해보고 첩의, 씨받이로 생겨난 자식을 내 아들처럼 호적에 올린다 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 그러한 아들들이 피를 나누어 준 자식에 비하겠는가? 이미 완전체가 아닌 반쪽의 사랑이다. 씨내리로 아들을 얻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