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홍상화 '선진 한국의 아버지'
[장서 산책] 홍상화 '선진 한국의 아버지'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2.02.03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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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번영은 지난 역사 속 폭풍의 결실!
그 격동의 서사를 펼쳐내다

저자 홍상화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거쳐, 1989년 장편 <피와 불>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작품을 영화로 각색하여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최우수각본상을 수상했다. 2005년 소설 <동백꽃>으로 제12회 이수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문예지 <한국문학> 주간과 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선진 한국의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을 가리키며 부제는 ‘(그가 남긴 유언)’이다. 목차는 ‘작가의 말 1, 등장인물도, 10·26 사건 개요, 박정희의 삶과 죽음, 선진 한국의 아버지, 편집자 주, 부록 1/ 작가의 말 2, ‘절대빈곤’으로부터의 탈출, 부록 2/ 작가의 말 3, 세계 속 ‘오늘의 한국’’으로 되어 있다. 소설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지 18년 만인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경, 청와대 옆 궁정동에 있는 중앙정보부 관할 안가(安家)에서는 주석이 벌어지고 있었다. 참석자는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 경호실장, 비서실장, 유명 여가수, 여대생이다.

여대생이 따라주는 위스키로 취기가 오른 대통령은 동석한 여가수가 통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는 달콤한 노랫소리를 듣고 있다. (...)

주석이 무르익어갈 무렵, 중앙정보부장과 경호실장 사이에 마산과 부산 지방에서 일어났던 시위 진압방법을 두고 언쟁이 벌어졌다.

“각하, 이따위 버러지 같은 자식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중앙정보부장이 경호실장을 가리키며 대통령에게 소리친다. 다음 순간 중앙정보부장이 권총을 꺼내 경호실장을 겨냥해 방아쇠를 당긴다.

“탕!”

총탄은 오른손을 뻗어 중앙정보부장을 만류하려던 경호실장의 오른손 팔목을 꿰뚫는다. 경호실장이 놀라 외친다.

“김부장, 왜 이래, 왜 이래……”

“무슨 짓들이야!” 깜짝 놀란 대통령이 자리에 앉은 채 호통친다.

“탕!”

자리에서 일어선 중앙정보부장이 총부리를 대통령의 오른쪽 가슴을 향한 채 방아쇠를 당긴다.

가슴에 총을 맞은 대통령이 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진다.

경호실장이 그 틈을 타 방에 딸린 화장실로 도망간다. 비서실장과 여가수와 여대생이 아연실색해 벌벌 떨고 있다. 중앙정보부장이 경호실장의 등을 향해 권총을 겨눈다. 그러나 방아쇠가 꿈쩍을 않자 방문을 박차고 방을 나간다. 시간은 정확히 7시 4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통령이 고개를 떨군 채 속으로 울부짖기 시작한다. (...)

 

내 영혼이 내 육체를 빠져나와 대기 속을 유영하고 있구나. (...) 저 땅 위에서 등에 업힌 내 보잘것없는 육체가 내 차에 실리는구나. 내 공기를 마시고, 내 음식을 먹고, 내 여자와 동침했고, 내 삶을 살아온 그 하찮은 육체는 나와 전혀 관계없는 낯모르는 육체다. 뒷좌석 비서실장의 무릎에 놓인 허물어진 나의 육체, 그래도 영혼이 빠져나간 줄도 모르고 육체 속에 남은 피로 영수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를 검붉게 물들이고 있구나. (...)

뭐라고? ‘유신(維新)’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비서실장, 김 장군! 왜 그렇게 마음이 약한가? ‘유신’을 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이나 해보았느냐?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패전을 똑똑히 목격한 자들, 특히 약삭빠른 지식인들과 기회주의 장사꾼들의 속마음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이제 한반도가 적화(赤化)의 다음 차례이니 김일성에게 일찌감치 점수를 따놓자는 지식인들과 여차하면 한몫 쥐고 외국으로 튀어버리겠다는 장사꾼들!

너는 모른다. 사이비 지식인들의 간사함을! 그들이 내세우는 민주주의는 겉치레일 뿐, 그들이 진정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김일성 치하에서라도 상아탑의 특혜만 누리면 된다는 심보이다. 아! 내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그들의 음흉스런 갈퀴에 또다시 순진한 젊은이들의 코가 꿰어 이리저리 잘못 끌려 다닐 세상을 상상해 보니…… 가슴이, 가슴이 터질 것 같다. (...)

(...) 드디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다. 이제야 손에 만져지는 모든 것들을 소중히 여길 자신이 생긴다. (검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손을 내미는구나. 저 손을 잡아야지. 어! 저 여자가 왜 저럴까? 뒤에서 모습을 감추고 서 있던 소복을 한 여인이 갑자기 노인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나에게 내밀었던 노인의 손을 잡고 간절하게 애원을 하고…… 왜 그렇까? 아, 여자가 고개를 돌리는구나. 아아! 영수다! (...)

영수! 당신의 순진함은, 당신의 고운 마음씨는 따스한 햇볕이 되어 망망한 대해의 몸부림치는 격랑을 잠재웠소. 파산 직전에 있는 노후한 한 척의 배를 구해낸 것이오. 당신의 아량은, 당신의 인내심은, 당신의 아름다움은 한 송이의 가련한 목련이 되어 발광하는 악마를 시인으로 변모시켰소. (...)

그래서 나는 그러한 미래를 창조하기로 결심했소. 보릿고개를 모르는 농민들의 미래, 초가지붕이 없는 농촌의 미래, 거지와 빈민이 사라진 도시의 미래, 아시아의 군사 강국으로 발돋움한 조국의 미래, 푸른 들판으로 변한 조국 산야의 미래, 선박과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조국 산업의 미래, 천시받는 국민이 아니고 존경받는 국민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한국 국민의 미래…… 나는 이 모든 것을 조국근대화, 민족중흥, 자립경제, 자주국방이라 부르고, 과거라는 독사와 맞대결하기로 한 것이오. (...)

착한 사람들이여! 이것을 내 작별의 말로 받아들여다오. 나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 그 누구이든 간에,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외로운 통치자의 서글픈 임종을 기억해다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당신들이 주는 그 어떤 원망과 저주도 저승에서나마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먼 훗날, 그곳에서 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한 한반도를 내려다보며 맛볼 수 있는 기쁨이 있다면 그 기쁨을 너희들 모두에게 돌려주겠다. (...)

내 딸들아! 착하게만 자란 너희들! 이 험한 세상에 너희들을 내팽개치고 떠나야 하는 이 아비의 비통한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 이 몹쓸 아비를 마음껏 꾸짖어다오. 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 이 통증이 영원히 지속되는 벌을 받고 싶구나. 내 생명과 세상의 어느 자식들보다 아버지를 사랑한 너희들, 그런 자식들을 천애의 고아로 만든 이 아비가 너희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다. (...)

아들아! 너의 존재는, 비록 내 옆에 있지는 않았지만, 내겐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이었고 원동력이었다. 너는 항상 내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의연한 음성으로 나를 움직여왔다. 네가 살아가야 할 조국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면 나는 내 생명을 한줌의 흙으로 바꾸는 데 서슴지 않았고, 너에게 명예를 유산으로 남길 수 있다면 그 어떤 혹독한 고통도, 천하가 공노할 그 어떤 잔인함도, 그 어떤 비굴함과 간교함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

아! 모래실(상모리)의 가난이 그립구나. 그곳에서의 가난은 나를 이토록 외롭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 순간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탄 차는 국군서울지구병원 정문에 도착한다.

“정지!”

경비병이 소리치며 막아선다. 비서실장이 차창을 내린다.

“나,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빨리 통과시켜라.”

비서실장의 고함에 경비병이 경례를 한다.

“충성! …… 통과!”

비서실장이 손목시계를 본다. 정확히 7시 55분을 가리키고 있다.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순간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이 대통령의 가슴을 꿰뚫은 지 14분 만이었다.(23~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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