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를 기리다 (상)
포은 정몽주를 기리다 (상)
  • 김정호 기자
  • 승인 2022.01.1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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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선생을 기리는 오천서원

포은 정몽주 선생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고려 말 충신 중에 한 분이다. 그러나 포은 선생이 경상북도 포항시 오천읍 출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고려 시대 마지막 충신이므로 개성 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다. 고려에 충성한 사람 중에 소위 3은으로 불리는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색 등은 모두 경상북도 출신이다.

포은 선생은 본관이 영일 정 씨로 영일은 포항 영일군 일대를 말한다. 그리하여 영일 정 씨 집성촌이 있었던 포항 오천읍 원리에 오천서원이 있다.

오천서원 입구 전경. 김정호 기자
오천서원 입구 전경. 김정호 기자

1월 정초 일요일을 택하여 오천서원을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천서원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관리인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낮은 담장 너머로 서원을 둘러보고 겨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오천서원은 선조 21년(1588년) 연일현 사람들이 선대의 옛터인 청림동(현 구정리)에 창건하였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선조 34년에 운제산 아래 다시 사당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광해군 4년(1612년)에 청림 옛터에 중건하고 포은 선생에게 제사를 올렸다. 광해군 5년 겨울에 사액을 내려 편액을 하사받고 형량 선생 위패를 같이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어 효종 3년 ~ 숙종 9년에 걸쳐 현 위치에 새로 중건하고 영조 16년에 설곡 정시도, 송강 정철을 별묘에 추향하였다고 전해진다. 고종 7년(1870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었다가 35년 후인 광무 9년(1906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오천서원. 김정호 기자
오천서원. 김정호 기자

오천서원은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을 동일 축선 상에 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를 이루고 있다. 전형적인 서원의 형태이다.

포은 선생 위패를 모신 충정묘. 김정호 기자
포은 선생 위패를 모신 충정묘. 김정호 기자

재미있는 것은 영일 사람들은 포은 선생이 영일에서 출생하였다 하고, 영천 사람들은 영천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유적지를 둘러보고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포은 선생의 부친이 영일 사람이고, 모친 영천이씨 고향이 영천이므로 추측하건대 모친께서 산월이 가까워지자 친정 고향인 영천 임고면에 가서 선생을 출산하였을 것 같다. 실제로 선생이 살았다는 생가는 영천 임고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