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에서 옛 추억을 만나다
국제시장에서 옛 추억을 만나다
  • 박미정 기자
  • 승인 2022.01.12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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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시절, 거창슈퍼에는 몸도 마음도
후덕한 거창 아지매가 있었다

 

부산 국제시장이다. 다닥다닥 붙은 상가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제과점을 찾았다. 70~80년대 구멍가게를 방물케 하는 제과점들이 옛 추억을 부른다. 

새댁시절, 주택단지가 즐비하게 늘어선 대구시 달서구 송현동에는 거창슈퍼가 있었다. 가게의 상호가 거창슈퍼인 것은 주인의 고향이 거창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물건을 사러 오는 고객들이 부르는 안주인의 호칭도 당연히 '거창 아지매'였다. 그녀는 성격도 체격만큼이나 둥글둥글 모난 데가 없었다. 매사가 좋은게 좋다는 성격으로 동네에서는 잠꾸러기 아지매로도 소문이 자자했다. 가끔씩 물건을 사러 가면 십중팔구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틈을 타서 동네 조무래기들이 손장난을 치기도 했다. 

하루는 웃지 못할 사건이 벌어졌다. 누군가가 거창 아지매가 잠든 사이 금고를 통째로 들고 간 것이었다. 밥 먹는 시간 빼놓고는 급할 것도 바쁠것도 없는 그녀도 금고까지 잃어버리고 보니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우짜노 우짜노' 발만 동동 구르다가 급기야는 자리에 눕고 말았다. 뒤늦게 퇴근한 남편이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하더니 동네가 떠나갈 듯 고함을 질렀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잠 못 자고 먼저 간 조상이 있나. 무슨 여자가 엉덩이만 바닥에 붙었다 하면 잠을 자노!" 

거창 아지매는 그 사건 이후 얼음물로 눈을 씻으며 가게를 운영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잠을 이기지 못한 그 날도 이마를 방바닥에 들이박고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마침 동네 개구장이들이 과자를 주머니에 슬쩍 넣는 것을 보았던 모양이었다. 거기에 내 아들도 끼어 있을 줄이야!

거창 아지매가 헐레벌떡 대문을 두드렸다. 아들이 몰래 과자를 들고 줄행랑을 쳤다고 했다. 가끔씩 진열대의 과자가 하나씩 없어져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꼬맹이들이 장난을 친 것 같다며 주의를 주라고 했다. 

뒤늦게 아들이 돌아왔다. 닥달을 했더니 친구와 군것질거리를 사려고 갔는데 거창 아지매가 졸고 있어 과자를 슬쩍 했다는 것이었다. 아들을 앞세우고 슈퍼로 갔다. 그녀는 여전히 졸고 있었다. 아들이 부끄러운 듯 거창 아지매의 어깨를 흔들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그녀가 용서를 구하는 아들에게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래! 누구나 잘못 할 수는 있지만, 용서를 빌기는 쉽지 않지." 아들에게 과자를 주섬주섬 집어 주며 아무래도 원인 제공은 자신이 한 것 같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세월이 흘러 아들이 고등학교를 진학 할 무렵, 거창슈퍼는 문을 닫았다. 곳곳에 대형마트가 생겨나고, 깨끗한 편의점이 활개를 치면서 동네 구멍가게들은 서서히 사라졌다. 

아들이 국제시장 제과점에서 과자를 고른다. 흑설탕이 다닥 붙은 사탕 한 봉지를 거머쥐며 하는 말, "어! 이거 옛날 거창슈퍼에서 많이 사 먹었는데." 나는 아들에게 꿀밤 한 대를 먹이며 거창 아지매에게 사탕값은 지불했느냐고 눈을 홀긴다. 아들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아마도 어린시절 친구들과 손장난질하던 추억을 더듬고 있으리라. 몸도 마음도 푸근했던 거창 아지매,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아들이 손에 든  쇼핑 바구니가 온통 그 시절 옛 과자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