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정종현 '특별한 형제들'
[장서 산책] 정종현 '특별한 형제들'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2.01.10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식민과 해방, 전쟁과 분단의 시대를 산 특별한 형제들의 한국 근현대사

저자 정종현은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0년에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에서 박사후 연수를 한 후,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HK연구교수와 인하대학교 HK교수를 거쳐 현재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책은 식민과 해방, 전쟁과 분단의 시대를 산 13쌍의 특별한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목차는 ‘1 식민과 분단으로 서로를 지운 ‘평양’의 형제 : 정두현과 정광현, 2 검찰총장과 남로당원 : 이인과 이철, 3 공산당 부역자와 ‘애국가’ 작곡가 : 안익조와 안익태, 4 ‘서유견문’의 후예들 : 유만겸과 유억겸, 5 근대 한국의 인플루언서 : 김성수와 김연수, 6 어느 식민지 조선귀족 형제의 삶 : 민태곤과 민태윤, 7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개척자 형제 : 김사국과 김사민, 8 ‘아카’에서 ‘빨갱이’로, 혁명가 남매의 비극 : 김형선·김명시·김형윤, 9 혁명가 집안에서 나고 자란 혁명가 형제 : 오기만·오기영·오기옥, 10 악인전, 매국적과 창귀 : 선우순과 선우갑, 11 오빠들이 떠난 자리 : 임택재와 임순득, 12 디아스포라 청년 시인의 죽음과 부활 : 심연수와 심호수, 13 혈연을 넘어선 이상의 형제들 : 모스크바 8진 형제’로 되어 있다.

이 형제들의 삶은 고귀함과 치열함, 비루함과 욕망 등 인간의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결속을 표상하는 ‘형제애’를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도록 이끌고 있다. 우리는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

13쌍의 형제 중에서 남과 북으로 갈라진 형제, 재벌의 시초가 된 형제, 사회주의 운동의 개척자가 된 형제, 조선족 문학을 지키고 알린 형제 등 4쌍의 형제들을 소개한다.

1. 식민과 분단으로 서로를 지운 ‘평양’의 형제 : 정두현과 정광현

정두현(鄭斗鉉, 1888~?)과 정광현(鄭光鉉, 1902~1980)은 평양의 유지였던 정재명(鄭在命)의 장남과 3남으로, 열네 살 터울의 형제다.

정두현은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를 거쳐 도쿄(東京)제국대학 농학부(1910.4~1914.7) 유학 후에도, 도호쿠(東北)제국대학 이학부(1927.4~1930.3), 타이완의 다이호쿠(臺北)제국대학 의학부(1938.4~1941.12) 등 세 곳의 제국대학에서 공부했다. 정광현도 형이 다녔던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제6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1925.4~1928.3)를 졸업했다.

정두현은 1946년에 김일성종합대학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의학부장이 된다. 그는 1946년 6월 17일에 북조선노동당에 입당하여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47년에는 유엔의 한국임시위원단 조직에 대항해 31명으로 구성된 임시헌법제정위원회에 김일성, 김두봉 등과 함께 선임되었다. 남한의 동생 정광현은 정두현의 사회적 경력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는 부담스런 존재였다. 그래서 정두현은 자필 이력서에 정광현을 올리지 않았다.

정광현은 1950년 1월부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1962년 정년 때까지 봉직했다. 그는 평생 저서 10권, 논문 136편을 발표했으며, 한국 친족상속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헌법에 남녀평등 이념을 구현한 법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정광현에게 북한 사회의 중추가 된 형은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형을 떠올리는 대신 정광현은 장인 윤치호에게 애틋한 정을 쏟았다. 그는 말년에 미국에 살면서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가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힘썼을 뿐 아니라 윤치호 전기를 집필해 애국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고자 했다.(15~31쪽)

2. 근대 한국의 인플루언서 : 김성수와 김연수

김성수(金性洙, 1891~1955)·김연수(金秊洙, 1896~1979) 형제는 “자기 땅만 밟고서도 전라도 전역을 다닐 수 있다”는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형제의 아버지 김기중(金祺中, 김성수의 양부)과 김경중(金暻中)은 구한말 전라북도 고창 지역의 유력 지주였다. 조선 왕조시대의 대유학자였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후손이었던 이들은 구한말에 토지와 미곡 판매로 재산을 축적했다. 김성수·김연수 형제는 김경중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큰아버지 김기중이 김성수를 양자로 들이면서 둘은 형제이면서 사촌지간이 되었다.

1914년 도쿄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김성수는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이 되었다. 그는 1919년 주식회사 경성방직 설립과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32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고려대학교로 성장시켰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수석총무가 되었으며, 1951년 6월부터 약 1년간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냈다.

교토(京都)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김연수는 식민지 시기 명실공히 조선을 대표하는 기업가였다. 그는 경성방직, 남만방적, 삼양사 등으로 사업체를 늘려가며 한국 최초의 거대 기업 집단, 곧 ‘재벌’을 일구었다. 이 ‘재벌’이라는 용어는 1932년 급성장하는 고창 김씨가의 사업체에 기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김연수의 ‘경방’은 삼성과 현대, SK, 한화 등의 창업자들이 사업을 막 일구기 시작할 때 선망의 대상이었던 한국형 재벌의 기원이었다.

김성수·김연수 형제의 남다른 점은 충실한 인품을 갖추었다기보다는 시세의 변화를 읽고 산업과 언론, 교육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안목과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가문의 모든 토지를 담보로 잡혀 망할지도 모르는 경성방직과 동아일보사의 대주주가 되는 결단은 아무나 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선 그럴만한 재산이 있어야 하고, 기업과 언론이 토지보다도 가문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치 있는 기관이라는 확신과 성공에 대한 자신이 있을 때 실행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감각과 안목은 오랜 일본 유학 생활에서 길러진 것이었다.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와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다니면서 형제는 전통적인 양반 지주의 방식으로는 새로운 세계에서 생존할 수 없다고 깨달았다. 그들은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을 직접 목격하고 지주가인 자기 집안과 조선의 미래가 근대화 및 공업화에 있다고 확신했다. 영민한 그들은 집안의 이익과 민족의 이익을 합치시켰으며, 결과적으로는 제국의 이익과도 조화를 이루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이 독립한 후에도 김씨 형제 후손들의 자산은 줄지 않았다. 조선 왕조 때부터 현재까지 이 가문은 통치권력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민족기업, 민족언론, 민족교육을 표방한 가문의 사업은 번창했고, 후손들은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95~112쪽)

3.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개척자 형제 : 김사국과 김사민

김사국(金思國, 1892~1926)은 1892년 11월 9일 충청남도 연산(連山)에서 소지주였던 김경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경수는 젊은 아내 안국당과 어린 사국·사민 형제를 남겨두고 요절했다.

김사국은 보성학교에서 배우고 17세 때인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피혁회사에 다니며 고학했다. 1909년에는 도쿄 한인유학생들의 연합단체인 대한흥학회에 가입해 <대한흥학보> 출판부원으로 활동했다. 귀국하여 한성중학에서 수학하고 함경도 덕원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18년 무렵 만주로 건너가 관동도독부 육영학교에서 고등교육을 이수했다.

1919년 2월 귀국해서부터 죽을 때까지 김사국은 당대 조선의 민족·사회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했다. 1919년 4월 김사국은 13도 대표자들로 조직된 ‘국민대회’를 개최해 임시정부 선포를 주도함으로써 한성정부 수립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 ‘국민대회 사건’으로 그는 1년 6개월 형을 살았다.

이때까지 김사국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가진 ‘대동단’ 계열의 민족주의자였다. 출옥 후 김사국은 민족해방을 위한 새로운 이념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국내 중심의 사회주의 대중 활동을 지향했다. 청년운동에선 서울 청년회, 노동운동에선 조선노동대회를 중심으로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특히 국내에 사회주의운동을 전파하는 데에는 서울청년회의 역할이 컸다.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사회주의자를 ‘서울파’라고 한다.

김사국의 삶은 합법적 활동 영역과 공산주의 전위당이라는 비합법의 영역에 걸쳐 있었다. 1923년 2월 20일 김사국을 중심으로 서울청년회 내부에 공산주의 전위당인 ‘고려공산동맹’이 결성되었다. 1923년 봄 고려공산동맹 책임비서 김사국은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코민테른과의 상설 연락기관을 설치하고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받는 임무가 그에게 부여되었다. 김사국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성과를 얻지 못했다.

1926년 5월 8일 오후 5시, 김사국은 평생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헌신하다가 폐병이 악화되어 서른다섯에 불꽃같은 삶을 마감했다.

김사민(金思民, 1898~?)은 형 김사국의 여섯 살 아래 동생이다. 서울파의 영수였던 형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김사민 또한 3·1운동 때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민족의 독립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불꽃처럼 살았던 청년 혁명가였다.

김사민은 형이면서 지도자인 김사국과 보조를 맞추며 조선노동대회 및 자유노동조합과 서울청년회, 그리고 고려공산동맹에서 경기 지역 오르그(조직책) 등을 맡으며 서울파 수뇌부의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자유노동조합은 지게꾼과 막벌이꾼 등 자유노동자 200여 명이 참여해 1922년 10월 창립한 직업별 노동조합이다. 김사민은 자유노동조합 발기총회의 취지서 작성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검거되고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23년 2월 1일 그는 구치감 문을 열고 들어서는 간수의 머리를 칼로 찍어 중상을 입혔다. 김사민은 그로 인한 고문으로 심신이 모두 망가진 상태에서 1924년 7월 26일 만기 출소했다.

일가의 비극은 계속되었다. 1928년 1월 5일, 남편 김사국 사후 1년 8개월 만에 그의 평생 동지이자 부인인 박원희가 죽었다. 그녀는 고려공산동맹원으로 그 자신이 쟁쟁한 사회주의 활동가이자 김사국·김사민 형제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다. 그녀는 김사국의 유지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을 하면서, 중앙집행위원으로 1927년 근우회 창립에도 참여했다. 한창 활동 중에 감기 기운으로 앓아누웠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갓난아이 딸 하나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김사국의 7주기인 1933년, 안국당과 김사민은 견지동의 청년총동맹 사무실 한 구석의 쪽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김사민과 그의 어머니 안국당은 구걸로 연명했다. 폐인이 된 둘째 아들을 보살피며, 먼저 간 장남을 떠올려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김사국·김사민 형제는 민족독립운동의 투사이자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개척자였다.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 고통받는 동족들을 식민 지배의 쇠사슬에서 해방시키려 한 형제의 삶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분단과 냉전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인색했다. 이번 세기에 들어서 김사국·김사민 형제와 박원희가 독립유공자로 서훈되고,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것은 뒤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들의 딸 ‘사건(史建)’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이 가족을 기억해야 할 책임이 있다.(133~150쪽)

4. 디아스포라 청년 시인의 죽음과 부활 : 심연수와 심호수

심연수(1918~1945)는 1918년 5월 20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가 여덟 살 되던 해 심연수 일가는 고향을 떠나 10년 동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 등지를 떠돌며 어렵게 살았다. 심연수가 열여덟 살 되던 1935년에 일가는 북간도 조선인들의 문화적 중심지였던 룽징(龍井, 중국 지린성 옌벤조선족자치주의 도시)에 정착했다.

심연수는 1940년 스물세 살의 뒤늦은 나이에 동흥중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부터 도쿄의 니혼대학 전문부 예술과에서 유학했다. 1943년 9월 만주로 돌아와 교사로 일했다. 1945년 8월 8일 아내와 부모 형제가 있는 룽징으로 돌아오다가 왕청현(汪淸縣) 춘양진(春陽鎭) 기차역 근처에서 무장 군경에게 죽임을 당했다. 해방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서였다.

심호수는 1925년 1월 22일생으로 형 심연수보다 일곱 살 아래의 동생이다.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어머니의 등에 업혀 고향인 강릉땅을 떠났다. 심호수는 열한 살 때 룽징에 정착했고, 중학교를 마친 후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심연수의 유학경비조차 온전히 감당할 수 없었던 궁핍한 살림살이는 심호수에게 더 이상의 공부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심연수가 죽은 후 심호수는 아버지와 함께 형의 시신을 수습해 안장한다. 이후 심호수는 형이 남긴 유복자인 조카 심상룡을 보살폈다. 그는 조카뿐만 아니라 형이 남긴 또 하나의 자식, 즉 시인의 유고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옌벤 조선인 사회에도 몰아쳤다. 심연수의 유고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일본 유학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 특무(밀정)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심호수는 형이 남긴 원고와 자료들을 비료 포대나 시멘트 포대 등으로 꼭꼭 싸매어 큰 오지독(항아리)에 넣고 땅 깊숙이 묻었다. 장마철에 눅눅해지면 꺼내어 말렸다가 다시 넣어 보관하는 일을 해마다 반복하여 반세기 넘게 그것들을 지켰다.

심호수가 목숨을 걸고 지킨 심연수의 유고는 열 권으로 묶인 습작 시집을 비롯하여 소설, 비평문, 감상문, 1940년 한 해 동안의 일기와 심연수가 주고받은 각종 편지와 엽서, 조선과 만주 일대를 경유한 수학여행의 기록, 어린 시절부터 대학 때까지의 각종 학습장과 읽었던 도서류 등 그 자료를 찍은 이미지만 8,000여 컷에 이른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이만큼 다양한 장르의 방대한 육필 원고와 내면과 생활상을 함께 볼 수 있는 생활 기록을 남긴 작가는 없었다.

1999년 팔순을 앞둔 심호수는 형의 원고를 책으로 출판하는 게 자기 삶의 마지막 숙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 원고 몇 편을 베껴 무단강출판사 등 여러 출판사에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단념하지 않고 60여 편을 베껴서 다시 옌벤사회과학원에 보냈다.

옌벤사회과학원 문화예술연구소는 원고를 검토하고 심호수가 가지고 있던 대량의 유고 진본을 확인한 후 ‘심연수 문학연구 소조(팀)’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정리에 들어갔다. 문화예술연구소의 상무편집위원 김룡운이 육필 원고를 분류·정리하여 옌벤인민출판사에서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사료전집-제1집 심련수 문학편>이 출간되었다. 이로써 심연수의 유고가 빛을 보게 되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2000년, 죽은 지 56년 만에 심연수가 시인으로 부활한 것이다.(247~262쪽)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