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㊸ 낙동강의 '낙동 나루터'
[꽃 피어날 추억] ㊸ 낙동강의 '낙동 나루터'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1.12.15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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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상주에서 대구 가려면 버스는 바로 갈 수 있었지만, 기차로는 김천에서 갈아타야 했다.
그래서 버스를 많이 타고 다녔는데 6~7시간 정도 걸렸다. 버스는 낙동강을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낙동강의 나루터. 상주 100년사 유튜브 참고
낙동강의 낙동나루터.  상주 100년사 유튜브 참고

195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 새마의 농가 수는 육십 여호로 정철 핼갈 기말기 보다 큰 동네였다. 겨울 방학 때 마을 앞 논에 물을 넣어 얼어붙으면 동네 형들과 같이 썰매를 타고 팽이를 치며 놀았고, 눈이오면 눈사람을 만들고 처마에 달린 고드름을 따서 갖고 놀았다.

썰매
옛날에 즐겨 탔던 썰매의 모습. 유병길 기자

아침은 꽁보리밥, 점심은 얼음판에서 주머니 속의 고구마 한 개를 입으로 깎아 먹었고 저녁은 묽은 갱죽을 먹었다. 그것도 못 먹으며 긴 겨울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갑이 할머니와 어머니 생전의 모습이다. 유병길 기자
갑이 할머니 시지댁과 어머니, 1970년대 후반 생전의 모습. 유병길 기자

친구 갑이는 겨울 방학이 되면 할머니와 같이 대구의 종조할아버지와 고모 집에 가서 며칠 동안 쌀밥을 먹었다고 자랑하였다. 대구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친구들은 갑이를 부러워하였다.

그때 초등학생 교복은 외출복이었다. 유병길 기자
초등학생 교복은 외출복, 대구 갈때도 교복을 입고 갔다.
유병길 기자

상주에서 대구를 가려면 아침 일찍 밥을 먹고 가는다리(세천)에서 버스를 타고 상주시내 왕산 밑 버스정류장에서 대구행 버스를 탔다. 도로는 1차선으로 좁고 비포장도로라 상주에서 버스를 타고 대구까지 가려면 6~7시간 정도 걸렸다. 

도로는 울퉁불퉁하고 주먹보다 더 큰 자갈이 깔려있어서 차가 많이 털털거렸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튕겨 올라 머리가 버스 천정에 부딪히는 사례도 많았다. 도로가 포장되기 전에는 장마가 끝나면 도로가 움푹움푹 파여서 마을별로 도로 부역 작업 구간을 지정하였다. 면에서 부역 날을 지정하면 전 동민이 우마차와 지게로 모래와 자갈을 냇가에서 운반 도로에 깔았다. 자갈을 깔아 놓으면 걷기도 자전거 타기도 힘이 들었다.

버스가 낙동면 낙동리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배가 있으면 바로 버스가 배를 타는데, 배가 강 건너 단밀면 낙정리에 있으면 그쪽에서 차를 싣고 이쪽으로 올 때까지 기다렸다. 양쪽 선착장에는 군고구마, 군밤을 구워 파는 구멍가게와 국밥을 파는 식당도 있어 기다리는 시간에 사서 먹었다. 날씨가 많이춥지 않을 때는 강은 얼어 있어도, 배가 다니는 뱃길은 얼지 않아 배 위에 버스가 타면 승객은 차에서 내려 배 위에 서서 강을 건너갔다.

배 양쪽에 세 명의 사공이 뒤를 보고서서 긴 장대를 어깨에 대고 뒤로 밀고 나가면 배는 앞으로 나갔다. 사공들이 뒤로 가서 밀고 또 뒤로 가서 밀면, 배가 선착장에 도착했다. 끈으로 배를 묶으면 버스가 시동을 걸어 땅에 내리고 승객들이 다시 차를 탔다. 차가 달리면 날리는 먼지 때문에 버스 뒤쪽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꼭 닫았지만 먼지가 버스 안에 가득하였다.

대구 시외버스 정류장(달성공원 부근)에 내렸다. 종조할아버지 댁을 처음 갔는데 시내버스를 타고 내려서 철길 밑의 컴컴한 굴다리를 지나야 하였다. 생활력이 강하신 종조할머니는 돼지와 닭도 키웠다. 시내 도로도 비포장이었으나, 편편하여 흔들림이 적었다. 교통순경이 중앙에서서 호루라기를 불며 팔을 흔들어 신호하였다. 이 버스가 우측으로 가야 하는지를 어떻게 아는가? 우측으로 가라고 팔로 신호를 하여 신통방통하였단다.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아침 일찍 혼자 버스를 타고 종조할아버지 댁을 가게 되었단다. 낙동강 선착장에 도착하였을 때 배가 강물에 꽁꽁 얼어붙어 배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뱃사공이 떡메를 들고 뱃길 옆의 얼음을 탕탕 두드리며 앞으로 나갔다. 탕탕 두드릴 때 ‘쨍’‘쨍’하는 소리가 났다.

뱃사공이 버스 기사에게 그냥 건너가라고 하였다. 사공들이 모래를 얼음 위에 뿌렸다. 승객들이 사공을 따라 강을 건넜다. 얼음 위를 걸어서 강을 건너보기는 처음이라 많이 겁이 났다. 버스도 시동을 걸어 강을 건너왔다.

60년대 초반 겨울 방학 때 중동면에 사는 친구 영철이 집에 가려고 친구 셋이 강가에 도착하고 보니 강이 꽁꽁 얼어 있었다. 작은 쪽배가 얼어서 못 간다고 사공이 떡메로 얼음을 쳐 보더니 따라오라고 하였다. 군화를 신어 미끄럽다. 강 중간쯤 건너갔을 때 ‘찡’‘찡’하는 소리가 나서 얼음이 깨질까? 무서워 오도 가도 못할 처지였다. 얼음이 ‘찡’‘찡’ 소리를 내야 꽁꽁 얼었다는 증거란다.

강을 건너다녔던 쪽배.
강을 건너다녔던 쪽배. 상주 100년사 유튜브 참고

5일 정도 영철이 집에서 놀다가 집에 올 때는 강 얼음이 녹아서 작은 쪽배를 타고 건너왔다. 강 양쪽의 큰 나무에 굵은 철선을 묶어 두고 사공이 그 줄을 잡고 당기며 강을 건넜다.

67년 3월 배가 건너다니던 낙동리 나루터보다 몇km 아래 선산군 선산면과 도개면을 연결되는 일선교가 준공되면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아름다운 풍경은 사라졌다.

86년 8월 낙동면 낙동리와 단밀면 낙정리를 연결하는 낙단교가 옛날 나루터 자리에 준공되어 상주에서 대구가는 차량이 건너 다녔다.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낙단대교가 준공되어 거의 모든 차량이 건너다니고 있다. 낙단대교 아래쪽에 새 대교가 건설되었고, 상주 영천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80년대 후반 이후에 태어난 사람은 낙동강 낙동리에 낙동강 나루터가 있었던 것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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