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근대골목] 달성공원에 일본의 신사가 있었다는데...
[대구근대골목] 달성공원에 일본의 신사가 있었다는데...
  • 안영선 기자
  • 승인 2021.11.2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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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도시철도 3호선 모노레일을 타고 명덕역에서 서문시장을 지나면 달성공원역이다. 달성공원역에 내려 10여 분 걸어 가면 달성공원이다. 달성공원하면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의 기억과 키다리 아저씨와 사진을 찍은 기억이 살아나는데, 달성공원에 일본의 신사가 있었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 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달성토성은 원래 달성 서씨의 세거지였는데 달성 서씨의 시조 서진 이래 아들 서기준 손자 서영까지 달성군에 봉해졌다. 시조 서진의 종손 서균형은 신돈을 탄핵한 인물이었고, 그의 아들 서침은 포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한 인재로 첨지중추원사, 전의소감 등의 벼슬을 했다. 세종 때 대구군을 대구도호부로 승격시키면서 달성이 천연으로 높은 성벽을 이루어 적으로 부터 방어 하기 좋은 곳이라 서침에게 남산동의 땅도 주고 자손대대로 녹을 주겠다고 했지만, 서침은 그냥 땅을 내놓으면서 녹봉을 사양하고 서민들의 환곡 이자를 탕감해 줄 것을 건의했다.

삼국사기에는 216년 216년 2월에 달불성이 축조했고 , 높이는 대략 4m, 둘레는 약 1.3km 정도라고 기록 되어 있다. 달성은 돌로 쌓았는데 성안에 우물 세 곳과 두 개이 연못이 조선초기 까지 있었으며 군창도 있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달성 서씨 집안에 전해 내려 오는 달성도 목판의 그림으로 당시의 모습과 달성공원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달성도(달성 서씨 집안에 전해온 목판 그림). 안영선 기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자주권을 박탈하고 조선 각지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일본인 거류민단을 중심으로, 1905년 달성공원 안에 대구신사를 세웠다. 우리나라 사찰의 일주문과는 다른 모습의 일본식의 도라이를 세워 신사임를 알리고 있다. 도라이는 보통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아래 위 두 부재로 연결하는 간단한 구조다. 아래 위 각각의 부재를 누키, 가사기라고 하며 나무로 만들고 진한 주홍색을 칠한다. 아래 사진의 도라이는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엽서를 찍은 것이다.

도라이 안쪽에 대구신사가 보인다. 안영선 기자

일본은 이세신궁 같은 일본 본토의 신궁을 최상급으로 두고 식민지로 보는 조선에는 신사를 만들어 신사는 하급으로 관리하는 등급제를 실시 했으며 이런 정책들은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로 대구사람들 우리의 땅에 일본인의 신사가 만들어 지는 것을 생각이나 했을까?

달성공원은 1963년 사적 제62호로 지정되었고, 1965년에 확정된 달성공원종합조성계획에 의해 1966년 대구신사는 철거 되었고 1969년 공원은 새로운 모습으로 조성됐다.

대구신사는 지금의 물개사육사 아래에 있었으며 도라이 받침돌은 지금의 테니스장 동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