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㊴ 백원역과 농촌 탈출(2)
[꽃 피어날 추억] ㊴ 백원역과 농촌 탈출(2)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1.11.17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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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농촌에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 젊은 사람들은 보따리를 싸서 이고 지고 들고 백원역을 통하여 서울로 서울로 농촌을 탈출하였다. 수송할 화물이 많았고 타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자가용이 늘어나고 수송물량이 줄어들면서 2008년 1월 12일 무인역이 되고 말았다
백원역의 모습이다. 유병길 기자
지금 백원역사의 모습이다. 유병길 기자

1950~6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에서 살기는 어려웠다. 50년 북한이 우리나라를 침공한 6.25 전쟁 후 폐허가 되었고 농촌은 도시보다 더 어려웠다. 농사를 지을 논밭이 없는 농가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백원역은 봉강리에서 6km 정도 떨어진 사벌면 원흥리에 위치한 경북선의 역이다. 외서면, 공검면, 은척면, 사벌면, 예천군 풍양면 일부 지역 사람들을 서울 대구 부산 등 대도시와 연결을 시켜 주는 역이다.

젊은 세대는 여기서 굶어 죽을 바에는 서울에 가서 죽든지 살든지 결단을 하고 이불 하나에 냄비 하나 숟가락 몇 개를 싸서 머리에 이고 지고 떠났다. 신작로인 세천으로 가는 길보다 가까운 샛길인 항새 머리를 돌아 연봉을 지나 백원역을 향하여 어린아이는 업고, 큰아이 손을 잡고 갔다.

겅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유병길 기자
겅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유병길 기자

아침 일찍 길을 걷다 보면 풀잎에 맺힌 이슬이 검정 고무신에 들어와 미끄러워 아이들은 넘어지며 백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서울로 올라갔었다.

상주에서 대구 가는 버스는 있었으나, 서울, 부산 가는 버스는 없었다. 서울, 부산을 가려면 백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김천역에서 갈아타야 했었다. 그때 백원역은 농촌 탈출구 역할을 하였다. 서울에서 힘들게 막 노동하며 살다가 돈을 벌어 설 명절에 깨끗한 옷을 입고 내려오면 고향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명절이 끝나고 올라갈 때는 친척이나 친구들이 따라 가고 싶어 하였다. 처녀총각도 먼저 올라간 친인척의 도움과 아름으로 서울에 올라갔다. 처녀는 잘사는 집의 식모로 들어갔고, 총각들은 남대문 동대문시장에서 짐을 나르는 지게꾼이 되어 돈을 벌어 고향의 부모님께 적은 돈이라도 보내드렸다.

증기 기관차의 모습이다.  kbs 황금연못 영상 참고
증기 기관차의 모습이다. kbs 황금연못 영상 참고

일제강점기 때 상주 지역의 밥맛 좋은 쌀과 외서 은척 공검 탄광에서 채굴한 품질 좋은 무연탄을 수탈하기 위하여 김천에서 상주 백원역까지 24년 10월에 개통하였다. 기차로 부산까지 운반하여 일본으로 가져갔을 것이다. 경북선은 계속 공사를 추진하여 점촌을 지나 안동까지 31년 10월에 개통하였다. 강원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무연탄과 많은 물자를 수송하였다. 44년 10월 전쟁물자인 쇠(철)가 부족 하자 점촌에서 안동 구간의 선로를 걷어 갔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미국의 원자폭탄을 맞고 45년 8월 15일 항복하면서 우리나라는 해방 되었다.

60년대 초 점촌에서 예천 영주역으로 연결되는 경북선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현장에는 28세 이상 병역 미필자들의 사회적 구제를 위하여 소집된 국토 건설단원들과 건설 회사가 공사를 추진하여 66년 10월 11일 김천에서 영주까지 경북선이 개통, 영동선과 연결되어 지역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화폐 개혁으로 환이 원으로 바뀌면서 백 원짜리와 같은 백원역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 중에 돈과 관련된 역은 일원역(서울 강남구 일원동. 지하철 3호선) 천원역(전북 정읍시 입암면 접지리. 호남선)이 있다.

백원역 청사 유병길 기자
백원역 청사. 유병길 기자

경북선 26개 역 중에 폐역이 14곳이고 무인역이 6곳이고 영업 중인 역은 6곳(김천 옥산 상주 점촌 예천 영주역)이다. 탄광이 폐광이되고 농촌에 사람이 줄고 자가용 보급으로 타는 사람이 줄었다. 백원역은 2008년 1월 12일부터 무인역이 되었다. 무인역으로 덩그렇게 남아 있는 백원역의 청사는 옛날 그때의 영광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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