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합니다” 절규하는 '자호천 권역사업' 추진위원장 할아버지
“억울합니다” 절규하는 '자호천 권역사업' 추진위원장 할아버지
  • 유무근 기자
  • 승인 2021.10.2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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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임고면 선원리 마을 일대 '자호천 권역 사업' 추진위원장의 호소

 

'자호천 권역사업'과 '경악스러운 그 날' 기록물을 발간한 취지를 설명하는 정희웅 추진위원장. 유무근 기자

경북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일대는 예로부터 충. 효의 고장으로 자연 경관이 수려했다.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버금가는 곳으로 신선이 있음직한 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선원이라 했다. 400년이 흘러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어 그 정신을 기리는 전통 지역으로 가꾸고자 ‘자호천 권역 사업’을 일으켜 지역의 번영과 화합을 도모하고자 했다.

마을 토박이 정희웅(78세) 씨는 2012년도부터 영천시와 중앙 정부를 오가며 각고의 노력 끝에 영천 임고면 ‘자호천 권역 사업’을 승인받아 57억 4천만 원의 예산을 배정받았다.

‘자호천 권역사업’은 2011년 농수산식품부에서 지원하여 권역 사업으로 영천시가 주관하고, 한국농어촌공사 영천지사가 지휘 감독하는 57억4천만 원 투입된 권역 사업이다.

사업 시행을 위해 임고면 내 6개 리 이장, 새마을지도자 중에서 10명의 위원을 선출하여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추진위원들은 아름다운 관광 고향 만들기에 혼연일체가 되어 공사 진행에 최선을 다한 결과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공사 진행과정에서 문중 간 의견이 충돌되었다. 일부 주민들은 ‘국민 고충 위원회’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갈등이 극에 달해 마침내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축소된 준공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자호천 권역 사업’으로 임고면 전체를 관광 벨트로 묶어 지역 이익 창출을 극대화 할 예정이었으나 미완성 된 상태로 현존하게 되었다. 위업을 완성하지 못한 아쉬움은 두고두고 반성해야 할 부분이며 한(恨)이라고 한다.

준공식 이후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정희웅 추진위원장의 3권 저서 중 ‘경악스러운 그날’을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추진위원장 정희웅 씨를 필자, 김00, 정00 등의 성명과‘일부 주민’으로 표기하였음.)

우여곡절 끝에 축소되어 완성된 다목적 마을회관. 선원리의 트레이드 마크다. 유무근 기자

필자는 ‘이 사업’의 진실을 밝히고, 이 사건을 교훈 삼아 더욱 번영된 고장으로 거듭나 서로의 친목을 다져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승화시키고자 죽기 전에 이 글을 남기는 데 뜻을 두었다.

필자는 1943년생으로 경북 영천시 임고면에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전통문화 보존 및 향토발전 향상에 관심이 많아 1995년부터 현재까지 영천시 향교의 서예부 총괄 담당으로 만학(晩學) 봉사를 했다. 농사를 지으며 1997.1월~2019년 7월까지 임고면 선원 1리 양수장의 관리인으로 22년간 봉사해 오던 중, 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이던 ‘자호천 권역 사업’의 추진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 ‘자호천 권역사업’ 내용은 ?

*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문화재와 한옥이 많고 사업장이 방대한 선원 마을을 위주로 한 기본설계로 사업 신청은 하였으나, 선원 마을은 규모가 크므로 후 순위에 두고 각 지역 마을부터 사업 신청을 받았다.

차기 사업을 유도할 수 있는 재원을 심는 목표로 규모가 큰 센터 건물과 소득사업장은 차기 사업으로 미루고, 기반사업만 하기로 영천시 건설과 실무진에 건의하여 약속을 받아 기본설계를 세웠다. 기본설계를 마치고 연말에 새로운 실무진으로 교체되고 사업 초기에는 권역 지역 간의 이해관계와 사업 규범에 어두워 다소 갈등은 있었다.

* 선원리 큰 마을은 2010년 농촌진흥청에서 인터넷 통계조사에서 살기 좋고 가보고 싶은 전국 농어촌 100선 마을에 선정되었다.

마을 뒤로 드넓은 솔밭과 문화재가 많은 고택이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함께 잘 어우러져 많은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오랜 세월 속에 헐리고 훼손된 곳이 많아 복원과 개발할 좋은 기회라 여기고 전 주민들과 연일 큰 관심을 두고 논의하였다.

* 덕연 마을: 자호천 권역 내 가장 넓은 면적과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마을로서 자연경관 절벽 아래 자호천이 흘러들어 폭포와 유원지를 보강하여 연중 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관광지이다. 마을이 크다 보니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있다. 윗마을에는 마을회관과 경로당이 있고 주차장이 있지만, 500여m 떨어진 아랫동네 덕연에는 노인인구는 많으나 경로회관이 없었다.

주민의 부담이 없는 사업으로 대지 매입하여, 노인 사랑방과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게 수로를 덮어 주차장까지 갖추게 되었다. 태풍에 높은 석축이 무너져 통행이 위태로운 길을 견고한 석축을 쌓아 올려 안전한 통행로를 개설하였다.

* 신원2리 마을: 고려 철 불좌상과 ‘선정사’ 등 문화재가 많은 마을이다. 임란 이후 나라에서 충, 효의 정려(旌閭)를 내린 의병장 정세아, 정이번 부자(父子)를 봉안한 ‘세덕사’와 ‘환구서원’이 있는 문화법전 마을이지만 도로가 좁아 대형 차량이 회전 주차할 수 없었다. 문화재가 많은 문화 보존 지역에 어울리는 한옥 모양 사랑방을 건립하고 관광버스가 회전 주차할 수 있게 하였다. ‘세덕사’ 환구서원 문중의 헌금에 힘입어 매입한 주차장을 갖추게 되었다.

마을회관은 1km 이상 떨어진 도로가 마을 새 각단에 있다 보니, 선원2리(대환) 본 마을은 노인인구가 많아도 개인 땅을 빌려 임시 건물에 의존하고 있었다.

전국 농어촌 100선에 선전된 마을. 자호천 권역 안내판. 유무근 기자

 

* 유서 깊고 한옥이 밀집된 선원리 한옥마을에 담장이 무너져 수백 년 동안 그대로 남아 있는 집이 없었다. 대략 2km 정도 자부담 20% 해서 경주 문화재 담장처럼 쌓아 올리고 주차공간과 마을에서 정자 연못을 돌아나가는 둘레 길을 만들었다. 아름드리나무와 어우러져 전경이 한층 아름다워졌다.

* 그 외의 마을 주민들의 자부담 없이 가장 절실한 사업이 무엇인지 순서대로 점검해 나갔다.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평천 2리 신촌마을은 노후 된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하였다.

또한, 같은 평천 2리지만 1.5km 떨어진 덤 밑 마을은 노인인구는 본 동네보다 적지 않으나 노인 사랑방이 없어 개인 창고를 빌려 많은 노인이 그곳에서 소일하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 논 한 필지를 매입하여 그 땅을 메워 24평 노인 사랑방을 건립하고 좁은 진입로 수로를 덮개를 씌워 관광버스도 회전 주차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였다.

* 선원 마을은, 차기 사업은 그때 일이고 우선 최상의 마을회관을 건립하는 방향으로 논의되었다. 권역 회의장을 겸한 다목적복합건물은 약 70평 규모에 부지포함 약 10억 예산이 거론되었다. 권역권 사업에 책정된 예산으로 매입이 어려워 긴급회의를 열어 헌금을 모으기로 의견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선원 마을 개발위원장 정희승과 자호천 권역 추진위원장인 필자가 즉석에서 헌금 록에 수백만 원씩 납명(納名)하자 많은 주민이 참여하게 되었고 원거리에 사는 형제 사촌 친지들까지 통보하여 단기간에 6천여만 원의 헌금을 모으게 되었다. 그 결과 후한 가격으로 5백 평을 매입하여 마을회관과 주차 공간 터를 해결했는데 보람을 느꼈다.

* 그 외에 평천3리 회관 리모델링과 평천1리 농민 휴게소, 자재 창고 등 마을 여건에 맞추어 마무리되었다.

약 2km 정도의 아름다운 한옥 마을 담장공사가 완공되었다. 유무근 기자

 

◆ ‘함계정사’ 경관이 아름다운 관광명소로 거듭나다.

* 마을 입구 언덕 위 수려한 경관 속에 자리한 ‘함계정사’(문화재) : 오랜 세월을 두고 자호천이 수려한 절벽 아래 부딪쳐 흘러갔지만 1959년 사라호 태풍 이후 지류가 바뀌게 되고 그 앞 드넓은 강이 매몰되어 지금의 소하천이 되었고 그 아래 1천여 평 토지가 개인소유로 불하받게 되었다.

이번 권역 사업으로 절벽 아래 아름다운 연못과 공원을 조성하고 무지개다리를 놓는 것이 주민들의 꿈이자 소망이었다. 영천시장이 방문하여 사업 제1호로 지시한 바 있다. 그런데, 계파 지주가 시세와 동떨어진 보상을 요구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동 연정을 경유하는 한옥마을 주변 2km 돌담길 조성

* 선원 마을 전체를 관망하면서 일주하는 둘레길 옆 문화재 담장과 같은 돌담 (자부담 20%, 1억5천만 원)으로 동 연정 연못을 아름답게 개축하여 둘레길을 연결하여 영화촬영지로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연정에 이른다.

* 다른 한편으로 선원 마을에서는 영천시 문화공보과에서 후원하고 있는 ‘한옥 보존사업’으로 가구당 8천5백만 원 지원에 3천5백만 원의 자부담인 사업 3개 동이 대상이지만, 고택 보존 의욕이 커져, 수억 원을 투자하여 고택 전체를 정비하는 집도 있어 마을 전체로 지출되는 사업비 지출은 7~8억 원에 육박하게 되었다.

* 이 모든 기본설계를 유관 기관장 인가 후 ‘자호천 권역 사업’은 회장단과 권역 위원, 지역주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특히 선원 큰 마을은 그렇게 큰 부담을 안고도 개발 의욕을 보여 ‘자호천 권역 사업 책임 감독기관인 ’한국 농어촌진흥공사‘ 경북본부장상과 영천시장 상을 수상했다.

’자호천 권역 사업 추진위원장‘ 지도력에 준공을 앞둔 관리 보존 차원에서도 반드시 소득 관련 사업이 뒤따라야 한다며 한옥 단지 조성까지 권장에 이르러 선진지 모델이 되었다.

* 매스컴에서도 널리 알려져 KBS 김안나 PD 작가로부터 선원개발 사업 과정을 알고 싶어해서 마을의 전경과 역사, 미래와 비전을 설명해 주었다. 현장 촬영에 이어 방영은 사업이 좀 더 진행된 후에 하 기로 약속을 받았다. 부단한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것이다.

그동안 그 많은 수난 속에 애태웠던 추진위원장의 말년에 전력을 다해 봉사한 보람이 있어 일생을 두고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권역사업 일환으로 아름다운 담장 약 2km가 완공되었다. 유무근 기자

◆ 순조롭던 ‘자호천 권역 사업’이 갑자기 중단된다.

* 잘 진행되고 있던 사업이 갑자기 정지되었고, 이미 기관장 승인 하에 60% 이상 잘 진행되고 있던 사업이 번복되었다. 사실이 아닌 진정서와 탄원서를 영천시에 올리다 못해 ’국민 고충 위원회‘ 까지 올려도 잘못된 점에 대한 불이익이나 제재할 합당한 규범은 없고 실무진의 책임만 따르니, 결국 실무진은 거짓 민원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는지 사업을 승인 번복~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 영천시 주무과에서 ’자호천 권역 사업‘ 추진위원회로 하달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선원 1리 다목적회관 축소. # 자부담 20% 동 연정 개축사업 취소 # 선원1리 주민들이 열의에 찬 헌금에 힘입어 매입한 주차공원 용지 매도 # 선원 2리 문화재(세덕사 환구서원) 종중의 헌금에 힘입어 매입한 주차공원 부지중 대형차량 주차장 부지 매도.

* 추진위원장 관점에서 한발 물러서서 하달된 공문대로 수용하였다. 문중과 주민들의 헌금으로 도와 매입한 선원리 주차공간을 보류하고, 선원 1리 다목적회관을 15% 축소. 동연정 자부담 20% 개축사업 취소하기로 하고 설계 변경에 의한 많은손실과 고뇌를 안고 사업을 속개하였다.

자부담 20% 개축사업 취소로 문중 논을 팔아 개축한 동연정. 유무근 기자

* 오랜 기간 거짓 민원으로 인하여 권역 사업이 지연되어 잃은 예산 손실은 누가 보상할 것이며, 설계에 따라 잘 마무리되어야 할 사업을 중단하고 그 예산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될 자호천 권역 실무진들은 망연자실이었다.

* 권역사업 추진위원들이 연일 논의해도 속수무책이었다. 이미 기본설계대로 업자의 손에 넘어가 사업이 진퇴양난에 빠져 고뇌 속에 7개월이 지나도록 해결책이 없었다. 사업장에서 바쁘게 움직였던 온갖 장비들이 풀 속에 방치되어 녹이 쓴 채 서 있었다. 추진위원장과 각 지역 추진위원들은 보수를 받아 챙기는 자리도 아닌 마을봉사자일 뿐인데 모두가 허탈한 심정으로 한심할 뿐이었다.

◆ 남은 건 이 기록물뿐이다

- 책자를 내면서까지 바라는 점은 무엇인지요?

* 팔순의 필자가 이렇게 자서전 쓰듯이 ‘자호천 권역 사업’의 전모를 밝히는 이유는, 명예 회복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도덕적으로나 양심적으로나 부끄러운 적 없고 베풀고 봉사하는 일념으로 살아왔다. 물처럼 순리대로 맑은 뜻으로 살아온 인생 끝자락에 재산도 건강도 명예마저 송두리째 다 잃고 남은 것이라고는 이 기록물뿐이다.

이 기록은 선조께서 물려주신 소중한 역사 자료로 삼아 필자의 가슴속에 묻어 두려고도 하였으나, 이들은 이 기록물을 들고 영천경찰서에 ‘이 내용이 전부 거짓’이라 고발하였다. 예측하건대, 기록이 틀렸다고 조사 받으러 오라는 것이 아니고 진실을 바꾸라고 조사받으러 나오라는 것이다. 강제 연행 통보를 받은 상태로써 마지못해 이를 공개하는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다.

“치적에 찬사를 받지 못할 양이면 지난날의 과격한 잘못에 사과를 받고 싶다. 이제 마을 전체가 혼연일체 되어 화합된 마을로 거듭나고픈 바람일 뿐이다. 다른 사심은 없다”라고 허공을 쳐다보는 정희웅 씨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필자의 저서 ‘경악스러운 그 날’을 토대로 대부분 인용하였다 >

 

향교 생할 20여 년, 가장 존경한다는 춘암 노재환 선생 글을 설명해 주는 정희웅 위원장. 유무근 기자